
故 허범욱 감독이 왜 제2의 연상호로 불렸는지 알 것 같다. 살처분 구덩이에서 살아난 돼지가 농장주의 피를 마시고 인간이 되는 설정부터 아주 기괴하다. 선임을 살해하고 탈영한 병사가 차라리 짐승이 되고 싶다는 절규는 두 번 다시 생각하기 싫을 정도로 비극적이다. 사회적 폭력, 약자를 억압하는 악순환, 군중의 잔혹함 등을 보여주며 강렬한 데뷔를 했던 연상호 감독의 초기작들이 오버랩된다.
살처분 속에서 살아난 돼지는 점점 인간의 생존 논리에 젖어든다. 처음에는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함이 있었지만, 인간 사회의 잔혹한 면을 닮아 간다. 동료 돼지들을 만나면서 계급화에 익숙해지고, 목적을 위해서라면 살인도 서슴지 않는 끔찍한 사고에 빠지고 만다. 점점 괴물이 되어 가는 이 돼지의 비극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 사회와 너무나 닮아 있다.
그런 면에서 돼지들의 갈등은 마치 국가의 종말처럼 보인다. 합리적인 연장자부터 시작하여 온건파와 강경파가 섞인 돼지 무리들이 하나의 공동체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들은 인간의 몸을 한 돼지를 두고 끊임없이 갈등하다 자신들 사이에서 '권력'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인간들의 시선을 피해 식량을 주워 먹고 다니던 그들이 어느새 계급 투쟁을 벌이는 것이다.
돼지가 인간이 되고 싶을수록 더 큰 결핍이 생긴다는 것도 역설적이다. 인간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이 곧 권력이 되고, 그 권력이 배척과 추방할 권리로 변용되면서 짐승답게 살아갈 자격조차 잃어버리게 된다. 돼지는 인간화가 곧 풍요로운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믿었지만, 결핍과 굶주림을 증폭시키는 셈이 된다.




사진=(주)인디스토리 제공
선임을 살해하고 탈영한 정석은 평생 따돌림과 괴롭힘을 당했다. 이미 인간의 삶은 끝났다고 느낀 그는 털이 돋아나며 자신의 삶에 사형 선고를 내린다. 우연히 만난 여성이 가지고 있던 실비아 플라스의 시 '아빠(Daddy)'는 정석의 이야기와도 겹쳐 보인다. 아빠에게 느끼는 폭력적인 권위, 트라우마, 결국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자기파괴 등이 정석에게 그대로 투영되면서 비극은 절정에 다다른다.
이 애니메이션이 허범욱 감독의 유작이 되었다는 점이 참 허망하다. 이 작품은 허범욱 감독만의 문법이 선명히 보인다. 인간이 되고 싶어 하는 돼지와 차라리 짐승이 되고 싶다는 인간을 통해 이 세상이 얼마나 잔인한지 구체적으로 묘사했다. 피해자가 다음 폭력의 가해자가 되는 악순환이 최고조에 오르는 순간, 이 세상이 개인의 절박한 감정마저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불쾌하고 우울하고 잔혹하지만, 돼지와 정석의 비극은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닌 것처럼 느껴져서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
그 어떤 행위도 더 나은 세상을 보장할 수 없다. 돼지는 인간이 되어 리더가 되고 구원자가 되고 싶었지만, 현실에서 벌어지는 폭력의 구조만 증명한 셈이다. 폭력이 피해자의 내면에 스며들고, 결국 새로운 지배의 형태로 되풀이되는 과정을 그린 이 비극적인 작품은 한국 역사상 최고의 애니메이션으로 기억될 것이다.
'구제역에서 살아 돌아온 돼지(Pig That Survived Foot-And-Mouth Disease)'는 오는 21일 개봉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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