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와일드 호스 나인'은 늙고 병든 CIA 요원 크리스(존 말코비치)에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남자는 케네디 암살 사건의 진실까지 알 정도로 요주의 인물로, 생을 마감하기 전에 회고록을 작성하기로 한다. 당연히 상부에서는 그의 회고록에 민감한 내용이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리(샘 록웰)에게 감시를 지시한다.
크리스와 리가 임무 수행을 위해 떠난 곳은 이스터섬. 1973년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쿠데타를 일으킨 칠레였다. 당시 소련과 냉전 중인 미국은 칠레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의 사회주의를 우려하여 CIA를 활용해서 공작을 벌인 것으로 전해진다. 크리스는 CIA에서 오랫동안 일한 사람이라서 곧 칠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잘 알고 있었다.
크리스는 CIA답게 생을 마감하는 준비도 철저하다. 여기서 영화는 중반까지 풍자적으로 소비하고 있는데, 칠레의 두 여학생을 우연히 만나면서 묘한 긴장감이 흐른다. 크리스는 오랫동안 비밀 작전을 수행하면서 배신과 폭력을 겪은 탓인지, 죄책감과 함께 염세적인 면이 뒤섞여 있다. 모아이를 큰 머리통으로 비하하면서도 이스터섬의 풍경에 조금씩 젖어들고, 주변을 맴도는 말들 앞에서 유일하게 감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런 크리스에게 집중할 수 있는 이유는 칠레에 대한 경고만은 진지하기 때문이다. 존 말코비치의 연기를 얼핏 보면 신화를 부풀리는 오만한 CIA 요원처럼 보이는데, 칠레에서 벌어질 끔찍한 일에 대해서만은 다른 사람으로 돌변한다. 폭력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아주 잘 알고 있는 은퇴한 요원이 체념이 섞인 실무적인 지식을 털어놓는다고 할까. 여전히 오만하고 냉소적으로 보이지만, 그런 잔혹한 인식이 선명해지면서 영화의 무게감이 완전히 달라진다.




사진=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제공
여기서 이스터섬 주변을 맴도는 말들이 이 작품을 영화적으로 바꿔 놓는다. 크리스는 이 말들을 보며 조금이나마 살고 싶다는 희망을 갖게 된다. 말에게서 처음으로 포장되지 않은 '자유'를 느꼈을 수도 있다. 평생 계산적으로 살아온 사람이니 모든 것이 냉소적으로 보이고, 죽음조차 CIA와 미국식의 농담으로 치부하니 말이다. 그런 그에게 말은 그저 살아 숨 쉬는 존재이며, 처음으로 계산적이지 않은 교감을 느꼈을 수 있다.
그렇게 영화는 크리스의 껍질을 하나씩 천천히 벗기며 한 노년의 고독한 삶을 위로하기 시작한다. 과거를 바로잡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시간도 없고, 영웅적 갱생도 아니라서 더 감성적으로 와닿는다. 이스터섬에 대한 동경이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그는 처음과 달리 인간적으로 변모한다. 죽음, 후회, 죄책감 등과 상관없이 삶의 이유를 되찾는 것 말이다.
겉으로는 침묵하는 듯하지만 후회와 슬픔이 보이는 힘. 그게 바로 마틴 맥도나 감독이 존 말코비치에게 주문한 연기였다. 존 말코비치는 눈빛과 동작 하나하나에 그 이상의 에너지를 보여줬다. 허술하면서도 노련함, 냉소적이면서도 쓸쓸한 인상을 교차해서 보여준다. 복잡한 인간 세계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생명체인 말 앞에서 보여준 마지막 연기는 지금도 여운이 남는다.
영화 '와일드 호스 나인'은 오는 4일 개봉하며 쿠키 영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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