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택배 기사 민준은 우연히 만난 점성가를 통해 영국으로 가면 대성한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후광을 따라 영국으로 가면 떡볶이 장사를 해도 성공한다는 것이다. 택배 노동으로 매일 지친 하루를 보내면서도 영화감독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는 민준이기에, 심심풀이로 찾아가는 점성가라고 해도 한줄기의 빛으로 보였을 것이다.
문제는 민준에게 술주정뱅이 아버지와 정신이 온전치 못한 형이 있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형의 장가를 위해서 3천만 원을 준비하라는 현실과 맞지 않는 말까지 하고 있다. 영화 '후광'은 이런 민준에게 그 어떠한 단서도 주지 않는다. 하루빨리 가족으로부터 벗어나지도 못한 채 노동에 매달리며, 꿈을 이루기 위해 단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꿈을 잠시 미뤄두고 생계를 꾸려 가는 청년들처럼 말이다.
노영완 감독은 민준의 본모습을 보여주고자 했다. 자신의 의지와 다른 삶을 살게 됐지만, 어떻게든 자신의 몫은 감당하며 살아가는 청년들의 초상화다. 슬프고 무섭고, 때로는 비관적으로도 보이지만, 강렬한 엔딩 속에서 피어나는 아주 작은 희망을 보면서, 영화 '후광'를 다시 곱씹어 보게 된다.
아래는 노영완 감독과의 일문일답.
- 민준의 일상을 오랫동안 보여주는 연출이 영화 '어느 파리 택배기사의 48시간'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이 영화도 파리 거리를 질주하는 택배 노동자의 삶을 오랫동안 보여주면서 그의 일상에 천천히 젖어들게 되는데요. 특별히 참고하신 작품이 있으신지 궁금하며, 민준이라는 캐릭터를 구상하시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으셨나요?
"<어느 파리 택배기사의 48 시간〉은 개봉 소식을 통해 알게 됐습니다. 서로 다른 곳에서 비슷한 인물이 영화의 중심에 놓인다는 점에서, 택배기사와 플랫폼 노동자의 삶이 세계 곳곳에서 중요한 현실이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후광〉을 준비하면서 여러 작품을 참고했습니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과 〈로제타〉, 이창동 감독님의 〈오아시스〉, 샹탈 아케르만 감독님의 〈잔느 딜망〉 등이 있습니다. 인물을 따라가는 카메라의 거리와 몸의 움직임, 일상의 반복 속에서 시간이 쌓여가는 방식 등을 유심히 살펴봤습니다.
영화를 구상하고 있을 당시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우리는 다음 세대에 무엇을 물려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됐습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 사회의 관계를 몸으로 연결하고 있지만, 정작 그 존재는 잘 보이지 않는 택배기사라는 인물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민준은 가족의 막내입니다. 저는 그가 가족의 가장 어린 구성원이면서도 앞선 세대가 남긴 문제와 삶의 무게를 감당해야 하는 인물이라는 설정을 했습니다. 어쩌면 지금의 청년들도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조건 속에서 삶을 시작하고, 그 안에서 어떻게든 자신의 몫을 감당하며 살아가야 하니까요. 그래서 민준이라는 인물을 통해 앞선 세대가 남긴 현실을 바라보는 동시에, 우리는 다음 세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함께 나누고 싶었습니다."

- '후광'은 보통 어떤 사람의 특별한 재능을 알아볼 때 빛이 난다는 표현으로 씁니다. 점성가가 후광을 따라 영국으로 가라는 조언을 할 때 민준에게 어느 정도 희망이 보였다고 생각했는데, 현실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사실만 드러납니다. 점성술을 도입하신 이유와 제목 '후광'에 담긴 의미는 무엇인가요?
"사람은 불안하거나 힘든 순간에 무언가에 기대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점성학일 수도 있고, 사주나 종교, 때로는 주식이나 코인이 되기도 하겠죠. 저는 이러한 모습이 우리 시대의 불안과 아픔을 보여주는 하나의 징후라고 생각했습니다. 정작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는 서로 기대지 못하고, 자신의 미래와 삶의 방향을 다른 무언가에 맡기게 되는 현실이 있는 거죠. 점성학은 그러한 불안과 현실을 드러내기 위해 선택한 하나의 은유적 장치였습니다.
특히 별자리를 타고난다는 말이 저에게는 굉장히 잔인하게 들렸습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자수성가할 별자리’, ‘후광이 없는 별자리’라는 말도 그렇습니다. 사람마다 출발선이 다르고, 개인의 노력만으로 바꾸기 어려운 현실이 분명히 존재하는데도, 결국 모든 것을 자기 힘으로 해내야 한다는 말처럼 느껴졌거든요. 민준 역시 그런 말에 기대어 희망을 품기도 하지만, 결국 자신의 몸으로 하루하루를 살아내야 합니다. 저는 그 모습을 통해 우리 사회에서 배경이나 뒷받침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현실을 함께 담고 싶었습니다.
〈후광〉이라는 제목에는 여러 의미를 담고 싶었습니다. 누군가에게 주어진 배경이나 조건일 수도 있고, 한 사람을 비추는 빛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난 뒤에는 그 빛을 조금 다르게 바라보게 되기를 바랐습니다. 어쩌면 우리 자신이 누군가의 후광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 가방을 도난당할 때 민준이 분노를 폭발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짐승처럼 호흡하는 민준의 표정이 이 영화에서 가장 긴장감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감독님께서는 이 장면을 통해 어떤 감정을 전달하고 싶으셨나요?
"이 장면을 촬영할 때 최강현 배우에게 마음속 아주 깊은 곳에서 끌어올린 짐승 같은 울음소리가 나왔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마치 헐크로 변하기 직전의 순간처럼 느껴지기를 바랐습니다. 그동안 억눌러왔던 분노와 세상에 대한 허망함이 한꺼번에 몸으로 터져 나오는 순간이라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동시에 그 폭발할 것 같은 감정을 끝내 스스로 통제하려는 민준의 모습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하게 생각한 부분이 민준이 마주한 상대가 자신보다 어린 청소년이라는 점이었습니다. 자신이 겪어온 폭력과 상처를 다시 다음 세대에게 되돌려줄 수도 있는 순간인 거죠. 하지만 민준은 분노 속에서도 스스로를 멈추려 합니다. 동시에 저는 그 청소년 역시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실 속에 놓인 인물이라는 점을 함께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 장면에서는 감정을 대사로 설명하기보다 호흡과 표정, 몸의 긴장을 통해 드러내고 싶었습니다. 저는 그 순간 민준이 얼마나 크게 분노하는가보다, 그 분노를 어떻게 견디고 멈추는가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관객의 시선이 다시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민준의 모습이 서서히 멀어져 가는 전 과정을 생략하지 않고 끝까지 보여주었습니다. 인물에게 집중되어 있던 시선이 잠시 멀어지면서, 관객이 자신의 시선과 감정을 돌아볼 수 있는 순간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 민준에게 차는 일터이자 잠자리고, 현실에서 잠시 떨어져 지낼 수 있는 피난처로 보였습니다. 꿈을 상상하고 준비하는 낭만적인 장소로도 보여서 영화의 결말이 더 아프게 다가옵니다. 차를 매개로 감독님께서 표현하고 싶으셨던 부분이 있으셨을까요?
"집이 더 이상 안전한 공간이 되지 못할 때, 사람은 어디에서 안정을 찾을 수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저 역시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살아가면서 가끔은 어디에도 온전히 제 공간이 없다는 느낌을 받곤 합니다. 그런 개인적인 감각이 민준의 차에도 담겨 있습니다.
민준에게 차는 일터이자 이동수단이고, 잠을 자는 곳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꿈을 상상하고 준비하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하나의 공간이 상황에 따라 서로 다른 역할을 하는 거죠. 저는 정해진 집에 머무르기보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공간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가는, 일종의 유목민적인 삶의 모습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민준은 그 차 안에서 오히려 편안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외부의 세계로부터 잠시 보호받을 수 있는, 마치 자궁과 같은 공간으로 상상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곳 역시 완전히 안전한 보금자리가 될 수는 없습니다. 집값은 계속 오르고, 청년들이 자신의 공간을 마련하기는 점점 어려워지는 현실 속에서 과연 우리는 어디에서 안정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담고 싶었습니다.
어쩌면 제 성향일 수도 있겠지만, 저는 영화 속 여러 설정에 서로 충돌하는 상황과 감정을 함께 놓으려고 했습니다. 민준의 차 역시 자유로움과 불안, 안락함과 위태로움이 공존하는 공간입니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일하는 차일 뿐이지만, 민준에게는 자신의 삶 전체를 담고 있는 공간인 셈입니다."

- 현관문 밖으로 상자를 쌓아 놓은 수령인이 민준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후에 상자들 틈으로 빛이 나오는 장면으로 이어지는 듯한데, 전달하고자 하신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303 호는 민준이 매일 반복해서 택배를 배달하는 곳입니다. 영화에서 직접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그 앞에 쌓인 상자들은 민준이 배달하며 하나씩 쌓아온 것이라는 설정을 두었습니다. 민준에게는 자신의 노동이 눈에 보이는 형태로 남아 있는 장소인 셈이죠.
반대로 집 안에 있는 사람에게 택배는 바깥세상과 이어지는 하나의 통로라고 생각했습니다. 집 밖으로 나오지는 않지만 계속해서 물건을 주문하고 받아들이면서, 자신이 그 안에 살아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거죠. 그렇게 보면 그 상자들은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남긴 삶의 흔적이기도 합니다. 한 사람은 배달하고, 다른 사람은 주문하면서 같은 장소에 두 사람의 시간이 쌓여가는 것입니다.
상자들로 둘러싸인 방 장면은 민준의 판타지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매일 반복해서 오가던 익숙한 장소도 어쩌면 마지막이라고 생각되는 순간에는 낯설고 신비롭게, 혹은 오히려 편안한 공간으로 다가올 수 있겠죠. 저는 그 순간 민준이 무엇을 보고 싶어 할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판타지 안에서 민준이 바라는 소박한 행복과 가족의 모습을 그려보고 싶었습니다.
동시에 민준이 매일 나르던 택배 상자들이 판타지의 배경을 이루도록 하면서,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낮추고 싶었습니다. 어쩌면 우리 삶에서 현실과 희망, 판타지의 경계는 생각보다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고 생각했거든요. 저희가 가진 현실적인 제약 안에서도 일상적인 사물들을 통해 인물의 정신과 마음이 느껴지는 영화적 판타지를 만들어보고 싶었습니다."
- 마지막 암전 직전의 연출이 상당히 강렬합니다. 무섭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아주 복잡한 감정이 드는데요. 관객들이 어떤 감정을 품고 극장을 나오길 바라시나요? 또한 고려하고 계신 차기작이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관객들이 꼭 한 가지 감정을 느끼고 나오기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슬프거나 답답할 수도 있고, 마지막 장면을 서로 다르게 받아들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그런 복잡한 감정들이 각자의 마음에 남아 있기를 바랐습니다. 다만 영화가 끝나는 순간 민준을 그곳에 두고 나오지는 않았으면 했습니다. 저 사람은 어떻게 되었을까, 누군가 곁에 있어줄 수는 없었을까 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남는다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이 극장 밖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이어질 수도 있겠죠.
저는 이 영화를 만들면서 자신을 가로막고 있는 벽을 넘어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컸습니다. 어쩌면 누군가를 안타까워하고, 연민하고, 곁에 있어주고 싶어 하는 마음이 그 시작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작은 마음이 관객들에게도 어떤 형태로든 전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차기작으로는 프랑스에서 일하는 한국인 여성 파티쉐에 관한 사랑 이야기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 택배 기사 분들이 우리 사회의 미세한 연결망이 되고 있으며, 영화에서나마 중심부에 옮기고 싶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 인터뷰를 보면 영화가 희망적으로 전개될 것 같거든요. 대부분의 관객들도 슬프게 받아들일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이 질문이 영화 〈후광〉이 궁극적으로 묻고 있는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영화를 만드는 내내 마주할 수밖에 없었던 질문이기도 하고요. 이토록 힘겹고 불안한 현실 속에서 우리는 어디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까. 저는 이 질문들에서 출발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구상했습니다. 저는 누군가를 안타까워하고, 연민하고, 그 사람을 위해 무언가를 해주고 싶어 하는 마음이 사랑의 출발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굉장히 교훈적이고 교과서적인 이야기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저는 그 당연한 이야기를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를 통해 몸으로 체감할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사실 제 안에도 인간에 대한 혐오나 불신의 마음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그런 감정들이 생겨날 수밖에 없는 순간들이 있잖아요. 하지만 그 마음을 조금씩 덜어내고, 다시 사람을 바라보고,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 수 있는 것이 인간적인 태도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저는 결국 희망이라는 것도 아주 작은 행위의 단위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를 바라보는 것, 그 사람의 존재를 알아차리는 것, 그리고 손을 내미는 것. 어쩌면 그 작은 행위들이 우리가 서로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후광〉의 마지막 장면이 슬픔이나 절망만을 이야기하는 순간으로 남지는 않았으면 합니다. 반복되는 삶의 굴레 속에서도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그리고 그 안에서 서로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저는 그 질문을 관객들과 함께 나누고 싶었습니다."
영화 '후광'은 오는 11일 개봉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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