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년 만에 '언더독'의 뉴마스터링 '길 위의 뭉치'로 돌아온 오성윤 감독과 인터뷰를 하면서 솔직담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보통 감독들은 흥행이 안 됐을 때 아쉽다는 반응 정도로 마무리하는데, 오성윤 감독님은 '흥행이 안 돼서 제목을 바꿨다'라는 취지의 답변을 했다. 웃음이 나오면서도 이런 인간미 덕분에 '마당을 나온 암탉'과 같은 감수성 풍부한 작품이 세상 밖으로 나온 것 같다.
감독님의 철학은 확고했다. 흥행 성적보다 관객들과 계속 만나며 작품의 생명력이 유지되는 과정을 더 소중하게 여기는 태도가 느껴진다. 그런 감수성이 '길 위의 뭉치'라는 작품의 따뜻한 결에도 자연스럽게 이어진 것이 아닐까.
아래는 오성윤 감독님과의 일문일답.
- 2019년 개봉 당시 제목인 '언더독'은 자연스럽게 반려견들의 처지와 현실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이번 뉴마스터링 작품의 제목을 '길 위의 뭉치'로 바꾸신 이유가 무엇인가요?
"제목 '언더독'은 애니메이션 영화로서 직관적으로 뭘 의미하는지 확 떠오르지 않는다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특히 어린이를 포함한 가족영화였는데도, 어린이들에게는 쉽게 다가가지 못하는 제목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좀 어둡고 무거운 이미지도 있어서요… 개봉 후 흥행이 안 되자, 제목을 의도적으로 어른을 겨냥해 지은 것이 들통난 기분이었습니다. 어른 관객을 끌어들이고 만족시켜야 진정한 가족 애니메이션이 된다는 것이 저의 소망이었거든요. 이제는 '탑독'이 되고 싶습니다.^^*
뉴마스터링을 준비하는 동안 정말 많은 분들이 힘을 합쳐 도와주고 있습니다. 특히 '마당을 나온 암탉'을 함께 만든 명필름에서 다양한 의견을 여러 차례 주셨는데, '길 위의 뭉치'가 가장 좋았고 마음에 들었습니다. 우리 영화가 새로운 길로 나아가고 많은 것을 경험하며 느끼고 깨닫게 되는 로드무비라서, 내용의 결이 잘 맞는 제목이란 생각이 듭니다.
인생과 삶의 여정을 길로 비유할 때 우리 모두가 그러하지 않을까 생각도 하고요. 그래서 각자의 그 길 위에서 자유를 찾아 나가고 행복을 누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되면 제목에 뭉치 대신 각자의 이름을 떠올리면 좋겠네요. '길 위의 0 0'. 힘든 고난도 예상되지만 자유로운 느낌과 더 나은 희망의 기대가 들어 있어 좋은 제목입니다. 뭉치는 주인공 이름이기도 하지만 다 같이 뭉치자는 의미도 있어 더 좋고요~ ^^*"
- 지금 봐도 박철민 배우님의 연기는 웃음이 나옵니다. 배우님의 연기를 보고 있으면 대본에 없는 것들을 즉흥적으로 만들어내는 센스와 재치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이런 애드리브가 제작 중에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궁금합니다.
"박철민 배우님과는 마당을 나온 암탉 때 '달수'(들판의 공인중개사 수달) 역의 목소리 배우로 만나 녹음하며 그의 캐릭터성을 잘 알게 되었죠. 그래서 이번엔 시나리오 쓸 때부터 배우님을 염두에 두고 대사를 쓰고 여백을 많이 두었습니다. 캐릭터 디자인도 비슷한 견종(시츄견)을 캐스팅하여 종이 다른 두 모습을 믹스하며 디자인하였고요. 역시 이번에도 기대대로 여백의 공간에 재밌는 애드리브를 깨알같이 잘 채워 주셨어요. 그런데 애드리브가 입말의 재미만 넣으면 그게 그렇게 재미없거든요. 박철민 배우님의 애드리브가 정말 좋은 건, 시나리오를 분석하고 내용과 감정선의 흐름에 맞게 잘 넣어주셔서 대부분 잘 사용하게 됩니다.
저희는 이번에도 ‘마당을 나옴 암탉’에 이어 선녹음을 더욱 강화했습니다. 특히 이번 영화는 3D 애니메이션 기법을 사용하게 되어, 보다 더 연기 연출도 잘하고 싶었고 대사 립싱크도 더 잘 맞추고 싶었습니다. 저는 좋은 목소리 연기는 감정선을 충실히 이해한 마음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마음이 담긴 목소리는 애니메이터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되고, 결국 더 좋은 애니메이션으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목소리 연기자들이 잘 해주셨고, 이번 '길 위의 뭉치'는 굉장히 만족합니다.
일반 실사 영화는 촬영 현장에서 감독과 배우 간에 창의적인 화학작용이 일어나며 좋은 연기를 같이 찾아 나갈 테지만, 우리 애니메이션은 그런 창의적인 현장성이 아무래도 좀 부족하거든요. 연기자로서의 애니메이터 훈련도 좀 부족한 편이고요. 그래서 스테레오 타입의 틀에 박힌 연기가 아닌 생생한 감정이 담긴 목소리 연기가 애니메이션 연출에 필수적으로 필요하다고 봅니다. 녹음실에서 목소리 연기자와 함께 영화 한편 찍는다는 생각으로 정말 열심히 녹음하였고 목소리 연기자들도 정말 잘 해주셨어요."

- 고속도로를 건너는 모습은 지금 봐도 설레는 명장면입니다. 자동차를 한 대씩 멈춰 세우는 반려견들의 용기가 지금도 눈에 선한데요. 이 장면을 통해 관객에게 어떤 감정을 전달하고 싶으셨나요?
"인간에겐 발전의 상징과도 같은 철도, 도로 같은 것으로 갈라놓은 땅의 경계가 그들에겐 생과 사의 갈림길이기도 합니다. '길 위의 뭉치'는 작은 경계를 넘어 차츰차츰 더 큰 경계를 넘어가는 이야기의 구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형태적으로도 그렇고 내용적으로도 장애물의 심도가 점점 더 커지죠. 그리고 (감추고 싶은 이야기지만)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의식을 기저에 깔고 만든 이야기여서 인간과 혹은 인간이 만든 반자연주의적 문명과 충돌을 일으키고 사고도 생깁니다.
그러나 뭉치네는 그 위험한 경계를 넘으며 한층 더 (자유와 행복을 추구하는) 자연아로서의 자신들의 정체성을 깨닫게 되고 여행을 지속하게 됩니다. 그 중요한 변곡점이 되는 지점이 '자유로'입니다. 고속도로명이 '자유로'여서 참 아이러니하게 다가옵니다. 작년부터 2년째 전국 시사회를 돌며 가족 관객과 어린이 관객을 많이 보게 되는데, 참혹한 현실을 보여주는 장면에선 어린이 관객에게는 참 미안하고 부족한 마음입니다. 그러나 또한 문제적 장면을 보며 엄마랑 같이 속삭이며 대화하는 모습을 보면 안심되고 영화 만드는 보람을 느끼기도 합니다."
- 개코가 말하는 '그곳'을 향해 달려가는 뭉치의 마지막 여정은 정말 조마조마했습니다. 이렇게 아슬아슬하면서도 따뜻한 감성으로 연출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마지막 장면은 고민이 참 많았습니다.
뭉치네가 정작 가고 싶은 곳은 어딜까?
길 떠난 유기견들이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만한 곳이 있기는 한 걸까?
'그곳'을 알 것 같다는 개코(세퍼드견종)는 코의 기억이 가물가물해 믿기도 힘들다.
시나리오 구상 단계에서 저 역시 그곳을 찾기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이 어디든 인간의 세상 속에서 찾기 힘든 곳이고, 설령 찾더라도 문제적 공간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마침내 찾아낸 그곳에 대해 관객과 같이 그 의미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다른 세계는 있지만 그것은 이 세계 안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우리 영화의 엔딩은 에필로그로 볼 수 있는 엔딩 크레디트의 그림들까지로 봐야 합니다. '그들이 그곳에서 잘 살아 내어 진정 자유와 행복을 찾을 수 있을까?'를 좀 더 깊이 있게 바라보게 되고 응원하게 됩니다. 길 위의 뭉치 2편도 기대하게 되고요^^*"

- 많은 팬들이 고속도로 장면과 마지막 뭉치가 달리는 장면 정도를 기억하고 계실 것 같습니다. 감독님께서 생각하시는 팬들이 놓치기 쉬운 명장면, 명대사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영화 초중반에 뭉치는 자신이 버려졌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다 같이 버려진 병든 개를 보고 조금씩 현실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병든 개가 힘든 몸을 이끌고 깊은 밤에 주인을 만나러 가겠다고 하자, 뭉치가 말려 세우며 다시 어둠 속으로 밀어 넣고, 깊은 상념에 빠져들며 각성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 뒤로 뭉치는 주인과 같이 놀던 테니스공을 떠나보내고 산으로 질주하며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는 흐름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테니스공은 영화 마지막까지 중요한 상징으로 사용되는 이미지여서 주목해 보면 좋을 듯합니다.
밤이의 들개 그룹 우두머리가 뭉치를 받아들이는 대목에서 "우리 이빨로 쇠를 자를 순 없지만 우리에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지"라고 충고하는 대사는 볼 때마다 웃음이 나오지만, 앞뒤 문맥상 중요한 키워드고 말 그대로 힘이 나는 대사여서 좋습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영화 전체의 키워드가 되는 대사는 짱아가 산으로 돌아다니는 뭉치를 보고 나무라며 "우리는 버려진 대로 살면 되고 사는 대로 생각하면 되는 거여. 버려진 개 주제에 지가 뭐라고 생각하는 데로 살겠다고 난리야. 난리가" 라고 호통을 치자 뭉치는 반발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갑니다. 이 말은 프랑스의 소설가 폴 부르제의 명언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명언을 응용한 대사인데 훌륭하신 고관대작의 상갓집에서 고인을 위한 송사를 듣고 반발심이 들어, 기억해 두었다가 역으로 우리 영화의 주제어가 되었습니다."

- 7년 만에 뉴마스터링을 하시면서 감회가 남다르실 것 같습니다. 재편집을 하시면서 다시 작품을 보셨을 때 다르게 다가오는 장면이 있으셨는지 궁금합니다.
"감독병이라고 할까요? 보면 볼 때마다 부족한 부분, 다시 만들고 싶은 장면들이 눈에 보입니다. 그러나 작년부터 뉴마스터링 본을 들고 이어져 온 전국 시사회를 관객들과 같이 하면서 '우리 영화 참 기특하다. 자기 생명력이 있어 이렇게 살아남아 관객과 같이 하는구나!'하며 대견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좋은 영화를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버텨온 짧은 영화 인생이 헛되지 않았음을 느끼고 위안을 많이 받습니다.
'길 위의 뭉치'는 이제 더욱 제 자식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어느덧 완성 후 초등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어 다시 세상에 나와버렸네요. 어두운 터널을 지나 빛의 바다로 나아가길 바랍니다.
햇수로 2년간 전국 시사회를 돌며 느낀 것이 있습니다. 인상 깊었던 건 주로 정원에서, 잔디밭에서 가족들과 그리고 반려견들과 함께 하는 야외 시사회들이었습니다. 야외공간이다 보니 자유롭게 관람하며 대화도 나누고 편안하게들 보십니다.
그러나 대부분 편한 자세로 시작된 관람 태도에서 시작해 점점 집중하는 모습을 보면 저도 모르게 긴장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좀 거칠고 무서운 장면이 나오면 아이가 엄마에게 뭔가를 질문하고 엄마가 속삭이며 설명해 주는 모습이 보이면 안심이 되고 대중예술가로서 영화를 선택한 것에 대해 보람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이렇게 '길 위의 뭉치'가 여러 영화제나 행사에 초대되는 이유가 뭘까 새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만큼 가족과 함께 볼만한 좋은 영화가 부족해서 아닐까 생각이 되고 우리 영상문화 발전의 현실을 심각하게 고민하게 됩니다."
한편 '길 위의 뭉치'는 오는 19일 개봉을 앞두고 있다.

댓글 (0)
댓글 작성
댓글을 작성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로그인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