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회 SIWFF] '아카시' 밴쿠버의 이방인, 고향의 낯선 평온을 마주하다

느린 호흡 속에 깃든 조부모와 현대 남녀의 씁쓸한 초상

사진=서울국제여성영화제
사진=서울국제여성영화제

영화 '아카시'를 연출한 요시다 마유미의 첫 출발은 다소 당황스럽다. 할아버지가 결혼 생활 내내 외도를 했다는 사실을 알았던 할머니가 "달리 방법이 없었단다"라고 한 말이 오래 기억에 남아 있었고, 그것이 바로 영화의 아이디어가 됐다는 것이다. 누구나 불륜을 저지른 배우자로부터 떠나야 인지상정이라고 이해하지만, 감독의 생각은 좀 달랐다. "이제는 선택지가 많아서 오히려 선택을 두려워하는 시대"라고 설명하는 감독의 의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분명히 할머니는 제도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선택지가 없었을 것이다. 그저 참고 살았다는 것이 바로 우리가 이해하는 과거 여성들의 생존 방식이었다. 감독이 말하는 현재의 선택지가 많다는 점과 과거의 선택지 부재는 쉽게 대칭시키면 곤란하다. 과거 여성에게는 남편과 끝낼 수 없는 구조적인 문제가 있었는데, 선택지가 많은 현재의 추상적 불안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것이다. 결혼과 출산, 경제적인 문제, 경단녀와 같은 문제는 지금도 현실적이니 말이다.

그런데도 이 영화는 꽤 귀해 보인다. 우리는 대체로 불륜이라고 하면 마땅히 분노해야 하고, 그럴 권리가 있다고 믿는다. 반면 누군가의 삶에서는 종종 그런 분노로 정리되지 않는다. 기나긴 결혼 생활로 사랑과 연민, 체념과 질투가 생기면서 어느새 인생의 동반자라는 감정이 남아 있게 된다.

할머니의 장례를 준비하던 카나는 할아버지가 와카코라는 여인을 사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할머니가 와카코에게 보이는 태도는 그저 어쩔 수 없다는 식이 아니라, 그런 불편한 마음을 품은 채 너무 오래 살아오면서 도달한 낯선 평온일 수 있다. 이러한 감성을 포착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불륜이라는 소재를 자극적인 막장이나 흔한 반전으로 소비하지 않았다는 점도 높이 사고 싶다.

그런 면에서 카나와 히로라는 남자의 관계는 흥미롭다. 조부모 세대는 선택지가 없는 삶을 지속했고, 카나와 히로는 선택지가 많은 현대 시대를 살고 있지만, 함께할 결심을 하지 못한다. 히로는 그저 평범한 남성이지만, 카나는 일찌감치 밴쿠버로 떠나 디자이너로 성공한 여성이다. 평범한 삶과 밴쿠버의 낭만적인 예술가의 삶을 대립시키는 방식이 다소 도식적인 면은 있지만, 사랑과 삶에 대한 선택을 두고 고심하는 두 남녀의 모습이 꽤 애틋하게 다가온다.

영화는 내내 흑백 화면을 통해 카나의 조부모를 애도하고, 고향 일본에서 이방인이 되어 버린 소외감을 강조한다. 과거와 현재 사이를 단절하는 듯하면서도 따뜻한 톤을 잃지 않는다. 잠깐이나마 허용된 감정이 순간적으로 컬러로 바뀌는 점도 인상적이다. 덕분에 영화의 질감이 더 아름다워 보인다.

굳이 문제를 꼽자면 영화가 지나치게 느리다는 점. 절로 관객의 사유를 끌어낸 점은 이해하지만, 사이사이의 공간에는 어느 정도 변화는 필요해 보였다. 아마도 단편을 장편으로 확장하면서 생긴 문제일 수도 있다. 장편으로 확장되면서 감독이 말하고 싶은 감정이 충분히 변주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대신에 흑백에서 오는 고요한 분위기와 정서적으로 어긋나는 순간들을 대화로 잘 풀어낸 점은 영화의 최고의 강점인 것 같다. 갈등을 해결하고 봉합하는 것보다 잠시 곁에 머무는 시간을 관찰하는 감각이 더 강해 보인다. 그 때문에 작품이 영화적으로는 약해 보일 수 있으나, 매 장면은 꽤 오래 남아 있다.

할머니의 그 한마디로 시작된 이 영화는 결정을 두려워하는 복잡한 감정을 세심하게 표현했다. 영화 속 질문들이 정교하거나 논증되지는 않아도, 감독이 함부로 재단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묘한 온기가 생긴다. 한국 정서로 보면 "그래도 불륜이잖아"라는 반응도 자연스럽고, 영화가 그런 불편한 감정을 완전히 설득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대신에 그런 납득되지 않는 감정의 잔여물을 따뜻한 톤으로 수놓은 덕분에 적어도 이 영화는 감독의 나쁘지 않은 데뷔작이다.

한편 영화 '아카시'는 제28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발견' 섹션에서 상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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