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세기 전쟁 직후 독일의 한 마을에 얼굴에 깊은 흉터를 지닌 낯선 군인이 나타난다. 자신을 버려진 농장의 상속자라고 주장하는 이방인. 그녀가 숨기고 있는 가장 큰 비밀은 이름도 재산도 아닌, 성별이었다.
영화 '로즈'가 제76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데 이어 제31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국내 관객과 만난다. 주연 배우 잔드라 휠러는 베를린에서 은곰상 최우수 주연 연기상을 수상했다. 해외 주요 매체들이 영화의 독창적인 주제와 휠러의 연기를 잇달아 높이 평가하면서 국내 개봉 전부터 관심을 모으고 있다.
영화는 30년 전쟁이 끝난 뒤 황폐해진 17세기 독일을 배경으로 한다. 오랜 전쟁을 거친 군인 로즈는 얼굴에 총탄으로 인한 흉터를 지닌 채 외딴 마을을 찾아가 자신이 오래전 버려진 농장의 정당한 상속자라고 주장한다. 마을 사람들의 의심을 받던 그는 성실하고 독실한 농부의 모습을 보이며 점차 공동체에 받아들여진다. 문제는 로즈에게 치명적인 비밀이 있었던 것. 그녀는 여성이지만 남성의 이름과 옷, 신분을 이용해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영화는 특정 실존 인물의 일대기를 그대로 옮긴 작품은 아니다. 마르쿠스 슐라인저 감독은 역사 속에서 남성으로 살아가기 위해 자신의 성별을 감췄던 여러 여성들의 기록을 조사해 하나의 인물인 로즈로 재구성했다. 슐라인저 감독은 여러 역사적 사례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밝혔으며, 관련 자료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남성으로 위장해 강제 결혼이나 성폭력을 피하거나 교육과 노동의 기회를 얻으려 했던 수많은 여성들의 사례를 접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해외 평단은 '로즈'를 단순한 시대극이나 미스터리로만 바라보지 않았다. 영화가 가장 집요하게 파고드는 지점은 남성에게 허용된 사회적 특권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인디와이어'는 "샐리 포터의 '올란도' 이후 성별의 특권을 이토록 효과적으로 탐구한 영화는 없었다"라고 평가했다. 이어 잔드라 휠러의 연기를 "놀라울 정도로 뛰어나다"라고 평가했다.
'사이트 앤 사운드' 역시 영화가 17세기 독일에서 남성의 정체성을 취하는 한 여성을 통해 성별을 흥미롭게 분석했다고 평가했다. 로즈가 바지를 입는 행위를 단순한 변장이 아니라 남성에게 주어진 자유와 권력을 획득하는 행위로 해석했다.
'타임아웃'은 한층 더 강한 찬사를 보냈다. 매체는 별 다섯 개 만점을 부여하며 "젠더를 뒤집은 걸작"이라고 평가했다. 영화가 17세기 중부 유럽에서 성별의 한계를 거부하는 독립적인 여성을 그리며, 남성의 신분을 통해 토지와 경제적 자유를 얻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도 주목했다.
'가디언'은 30년 전쟁 이후 독일을 배경으로 한 강렬한 흑백 시대극으로 평가했다. 역사 속에서 남성으로 살아갔던 여성들의 실제 사례와 마르탱 게르 사건 등을 결합한 작품으로 바라보면서, 성별과 정체성, 사회적 규범을 탐구하는 영화라고 분석했다. 특히 잔드라 휠러의 연기에 대해서는 절제되면서도 강력한 존재감을 보여준다고 호평했다.
'로즈'는 제76회 베를린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서 공개된 뒤 'Screen Daily'가 집계한 경쟁부문 평론가 평점에서 평균 3.3점으로 1위에 오른 바 있다. 전체 경쟁작 가운데 다섯 명의 평론가로부터 최고 등급인 4점을 받은 작품으로 기록됐으며, 최종적으로 잔드라 휠러가 최우수 주연 연기상인 은곰상을 수상했다.
연출을 맡은 마르쿠스 슐라인저는 독특한 이력을 가진 감독이다. 그는 장편 연출에 나서기 전 17년 동안 캐스팅 디렉터로 활동하며 미하엘 하네케, 울리히 자이들, 제시카 하우스너 등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감독들과 작업했다. 특히 하네케의 '하얀 리본'에서는 아역 배우들의 캐스팅뿐 아니라 현장에서 이들의 연기 지도까지 담당했다. 이후 '마이클'과 '안젤로'를 연출했으며, 두 작품에 이어 '로즈'로 세 번째 장편 연출작을 선보였다.
베를린에서 배우상을 거머쥔 잔드라 휠러의 연기, '올란도' 이후 보기 드문 방식으로 성별과 권력의 관계를 파고든 이야기, 미하엘 하네케와 함께 작업했던 마르쿠스 슐라인저 감독의 절제된 연출까지. 이미 해외에서 상당한 평가를 받은 '로즈'가 부산에서 국내 관객들에게 어떤 반응을 이끌어낼지 주목된다.
'로즈'는 제31회 부산국제영화제 월드 시네마 부문에서 국내 관객에게 처음 공개되며, 국내 개봉은 내년 상반기 예정이다.

댓글 (0)
댓글 작성
댓글을 작성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로그인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