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캐리어를 끄는 소녀'는 한국 드라마의 익숙한 설정으로 시작된다. 빚쟁이 양부모로부터 도망친 소녀 영선(최명빈)이 또래 수아(문승아)의 테니스 훈련 파트너가 되면서 그녀의 집에 머물게 된다. 갈 곳이 없던 영선은 어떻게든 수아 부모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하지만 그리 녹록지 않다.
가난한 소녀가 부잣집에 들어오면서 시기와 질투를 받으며 성장하는 이야기. 주로 한국 일일드라마에서 본 설정이다. 영화는 그런 흔한 성장담이 얼마나 조건적인지 보여준다. 영선과 수아가 어른 세계의 위선을 먼저 감지하는 점도 흥미롭고, 그렇게 생긴 균열 덕분에 꽤 오래 기억에 남을 작품이다.
영선은 마냥 가엾은 피해자는 아니다. 수아 어머니(유다인)의 선의를 빠르게 눈치채고, 도망친 양부모를 모함하더니 계획한 대로 수아의 집에 머물게 된다. 이것을 단순히 계산적인 행동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욕망이라기보다 생존 기술에 가깝고, 어릴 적부터 어른들의 표정에서 빈틈을 읽어야만 하는 그런 삶 자체도 비극인 것이다.
대부분의 스포츠가 그렇지만, 테니스는 기본적으로 파트너와 경쟁자가 있어야 하고, 코치와 부모의 지지도 필요하다. 영선은 파트너라고 하지만, 사실상 수아가 무너지지 않도록 적당히 들러리 역할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애초에 영선의 재능이 존중받는 것이 아니라 수아를 받쳐줄 도구가 필요한 것이다.
여기서 영선의 꽤 의미심장한 대사가 나온다. 파트너 제안을 받은 영선의 담당 선생은 이미 수아 부모에게 큰돈을 받았기 때문에 이 거래를 포기할 생각이 없다. 그러니 영선의 불만에도 "애도 아니고 철없이 왜 그러냐"라는 식으로 핀잔만 준다. "다 너를 위해서야.", "세상이 원래 그래."라는 식의 어른들의 아주 성의 없는 합리화인 것이다. 영선은 "난 아직 15세밖에 안 됐다"라며 애라는 것을 인정한다. 비겁하고 성의도 없는 어른들의 변명을 소녀의 솔직한 언어로 맞서는 순간이다.
수아 역시 그저 무례한 부잣집 딸로 그리지 않는다. 영선을 시기하고 질투하며 모함까지 하지만, 동시에 아버지의 표정 하나하나에 흔들리는 소녀다. 그런 면에서 영선에게 "완전히 혼자가 됐으니 좋겠다"라는 식의 대사는 섬뜩하면서도 슬프다. 물론 영선은 양부모와도 인연을 끊었기 때문에 전혀 좋은 상황이 아니다. 두 소녀 모두 아직 어린 탓에 상대가 가진 표면만 보며 부러워하는 모습은 이 영화의 가장 아픈 부분이라고 할 것이다.
수아 아버지와 어머니도 결핍이 있는 사람들이다. 전 테니스 선수였던 아버지는 실패와 상실을 딸을 통해 보상받으려고 하지만, 사랑과 감정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다. 수아의 작은 실수도 자신의 실패로 느끼는 사람이라 늘 우울해 보인다. 수아 어머니는 불안한 감정을 억누르기만 할 뿐, 딸과의 갈등을 바꿀 용기가 없다. 억지로 억누르니 오히려 통제가 되어 수아에게는 더 고통스럽다. 악의는 없는 사람이지만, 부모가 무력감을 견디지 못하면 아이도 상처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캐릭터다.
덕분에 테니스를 포기하지 않는 영선의 결말은 나쁘지 않다. 일일드라마에서 볼 법한 큰 보상은 없지만, 최소한 수아의 가족보다 큰 변화가 있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영선이 수아의 집에 대해 말한 '바다'라는 것이 때로는 평온한 바다가 아니라 모든 것을 삼켜 버리는 거센 파도일 수도 있으니까.
한편 영화 '캐리어를 끄는 소녀'는 내달 2일 개봉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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