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레미스'라는 마을로 전근을 온 교사 세르지오는 과거의 상처 때문에 갑자기 눈물을 흘리는가 하면 술에 취해 폭력적으로 돌변한다. 얼떨결에 술집 여자를 따라 교회에 다다른 그는 마테오라는 소년과 포옹을 한 뒤에 생기를 되찾는다.
레미스가 기차 사고로 수많은 인명 피해가 있었는데도 이탈리아에서 가장 행복한 마을이 된 배경에 바로 마테오가 있었다. 마테오와 포옹을 하면 기억은 그대로지만, 그 기억으로 인한 고통만 없어지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고통이 완전히 해결되는 것이 아닌 일종의 진통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어찌 되었든 세르지오는 덕분에 짓궂은 농담도 할 정도로 활발해지는데, 마테오에게 호기심을 느끼면서 예기치 않은 사건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마테오를 보면 비극적인 X맨을 보는 듯하다. 이 소년은 고통을 없애주는 대신에 에너지가 빠지는 부작용도 있지만, 포옹을 한 사람에 빙의하여 조종하는 능력이 있다. 아버지라는 사람이 중백의를 입히며 거룩한 일로 치장은 하고 있으나, 실은 자신을 괴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X맨의 '로그'처럼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는데, 아버지와 마을 사람들의 강요로 점점 삐뚤어지기 시작한다. 평소 미운 사람이거나 짝사랑하는 사람에게 빙의해서 자신의 변태적인 욕망까지 드러내는 것이다.
마테오 능력의 설정만 봐도 흐름은 어느 정도 짐작은 할 수 있다. 세르지오는 예상대로 아들을 잃은 슬픔에 무감각해지는 것이 점점 불편해진다. 죄책감과 후회 때문에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들지만, 마땅히 아들에 대한 사랑의 흔적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슬픔도 가능한 것이다. 세르지오의 이런 뒤늦은 깨달음은 레미스 주민들의 혼란으로 이어진다. 서로를 돌보며 상처를 견뎌낸 것이 아니라 한 소년에게 외주를 준 결과니 말이다.
마테오는 인간답게 살 권리를 빼앗긴 소년이다. 천사라는 이름이 칭찬처럼 들리지만, 사실 그 이면에는 욕망이나 분노, 성적 정체성, 선택권마저 허용되지 않아야 한다. 아버지의 통제와 주민들의 그러한 기대감 때문에 더욱 고립되는 것이다. 주민들에게 위로를 주는 존재로 소비는 되고 있지만, 정작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셈이다.

그런 면에서 영화의 결말은 꽤 흥미롭다. 마치 플래시몹을 연상케 하는 레미스 주민들의 행동은 억눌렸던 고통으로 인한 처절한 몸부림으로 읽힌다. 모두가 같은 상처를 공유하지만, 감당하지 못한 채 여린 소년에게 맡긴 결과를 보는 것 같아 씁쓸하면서도 묵직한 여운을 남긴다.
상처로 인한 고통에 대해 파고드는 영화라서 내내 숙연해지기도 하지만, 고통의 배출구가 되어 버린 마테오가 모두와의 관계를 뒤집어 버리는 순간, 그 폭발력은 대단하다. 레미스의 행복이 마테오의 희생 위에 세워진 가짜라는 점에서 결말이 꽤 충격적이다. 마테오가 괴물이라서 아니라, 어른들이 애도하지 못한 대가를 몸으로 치르게 한 결과니 말이다.
영화 '홀리보이'는 오는 7일 개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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