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심경 감독은 캐릭터들을 윤리적으로 바라보면서도, 불쌍한 존재로 소비하는 것은 경계한다. 영선은 부모도 없고, 양부모로부터 버림받고, 어른들에게 이용당하지만 단순히 피해자로 만들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행동하며 어떻게든 수아 가족에 들어가서 삶을 바꾸려고 한다. 감독이 영선에 대해 '생의 의지'라는 표현을 쓴 것도 그 때문이다.
인터뷰를 하면서 의외로 낭만적인 부분도 찾을 수 있었다. 영선과 수아 가족에 대한 결핍과 냉혹한 현실을 얘기하면서도 마지막에는 결국 '희망'으로 돌아간다. "흙바닥 코트에 다시 선 영선이 되찾은 건 '오늘' 그리고 '희망'"이라는 답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영선은 분명 불쌍한 아이지만, 그 익숙한 재료를 통해서 소녀의 욕망, 어른들의 결핍, 보호라는 이름 하에 이뤄지는 통제, 그리고 다시 일어서는 힘을 이야기하고 있다.
아래는 윤심경 감독과의 일문일답.
- 영선이 담당 코치에게 "나 아직 15세밖에 안 됐어요."라고 말한 대사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어른들이 아이들을 설득할 때 흔히 쓰는 합리화를 무너뜨리는 것 같아 아직도 그 대사가 기억이 납니다. 그 장면을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으셨나요?
"영선이는 자신의 선택과 상관없이 혼자 남겨졌어요. 부모도 없고, 양부모에게도 버림받았죠. 열다섯 살 영선에게는 이것부터가 페어플레이가 아닌 거예요. 그런데 노력하면 노력한 만큼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거라 믿었던 테니스의 세계마저 그렇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된 거죠.
영선은 자신의 분노를 코치가 이해해 주길 바랐지만, 코치는 현실적이고 냉정한 태도를 보여요. 코치와 영선의 대비가 두드러진 이 장면을 통해, 영선이 처한 현실의 냉혹함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코치를 상대로 영선이 쏟아내는 "저 아직 열다섯밖에 안 됐다고요"라는 대사를 통해, 영선이의 억울함과 기댈 곳이 필요한 영선의 마음이 드러나길 바랐어요. 동시에 영선이 현재 자신의 존재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게 영선 캐릭터의 기준점이고, 그게 서 있어야 앞으로 영선이가 하는 선택과 행동들을 이해시킬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 수아가 영선에게 "축하해. 너 이제 혼자네"라고 말한 대사는 섬뜩하면서도 슬픕니다. 두 소녀 모두 아직 어린 탓에 상대가 가진 표면만 보고 부러워하는 것 같아서 이 영화에서 가장 아픈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수아와 영선은 서로에게 어떤 의미였을까요?
"가족과 보호가 필요한 영선은 아무런 노력 없이도 그것을 갖고 있는 수아가 부러웠을 거예요. 반면, 아빠를 만족시켜야 한다는 부담감과 엄마의 무심함 가운데 살고 있는 수아는 혼자여서 자유로운 영선이 부러웠을 거고요. 테니스를 두고서도 마찬가지예요. 자신이 좋아하는 꿈(테니스)도 자기 힘만으로는 유지할 수 없는 영선은 힘들이지 않고 성취하는 수아가 부러웠을 거고, 테니스를 습관처럼 하고 있는 수아는 테니스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영선이가 부러웠을 거예요. 서로가 자신에게 없는 것을 가진 셈이죠. 때문에 영선과 수아의 관계에는 잔혹한 아이러니가 있어요.
하지만 영선과 수아는 잠시나마 서로를 이해하고 연민할 수 있는 또래 친구이기도 했어요. 어른들에게는 하지 못했던 이야기, 어른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마음을 둘만의 언어로 나눴으니까요. 친구로 오래 남을 수는 없었지만, 영선과 수아는 서로에게 결핍된 것을 비추어주는 동시에 자신을 이해해 준 특별한 존재로서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수아에게 영선은 부모에게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꺼낼 수 있게 해준 친구였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클 것이라 생각해요."

- 영선이 양부모와 다투고 수아 어머니에게 연락하는 과정은 어떻게 보면 생존 기술에 가까워 보입니다. 어릴 적부터 어른들의 표정을 읽어야만 하는 그런 삶이 안타까워 보였는데요. 영선이라는 캐릭터를 설정하시면서 중요하게 생각하신 점이 무엇이었나요?
"영선은 자신의 욕망 앞에서 솔직하고, 그 욕망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인물이어야 한다는 점을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영선의 도전을 통해 '생의 의지'를 보여주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속으로는 폭풍이 불어도 겉으로는 단단해 보이길 바랐어요. 고민보다는 행동하는 영선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고, 그 누구의 시선으로도 영선을 피해자로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했어요. 하지만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관객이 비로소 영선을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랐어요. 그때 우리가 마주하는 것이 영선이라는 한 아이를 넘어, 여기까지 끝내 걸어온 우리 자신의 모습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이런 부분을 생각하며, 캐릭터를 만들어 나갔습니다."
- 영선이 떠난 뒤에도 수아 가족은 예전 모습 그대로 돌아온 것 같습니다. 영선이 큰 균열을 가져온 것 같지만, 근본적으로 바뀐 건 없어 보였습니다. 다만 수아 엄마가 영선의 흔적을 잠시 떠올리는 장면에서는 어느 정도 변화는 감지된 것 같은데요. 영선과 수아 가족은 서로에게 어떤 변화를 남겼다고 생각하시나요?
"영선은 다시 한번 원하는 걸 갖는 것이 쉽지 않다는 걸 알았을 거예요. 세상이 가진 벽이 만만치 않다는 것도요. 하지만 영선의 도전은 멈추지 않을 거라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수아 가족이 영선에게 남긴 게 있다면, 더 깊은 좌절과 실패 속에서도 다시 일어서는 법이 아닐까 싶습니다. 일종의 '굳은살' 같은 거요. 반면, 영선이 수아 가족에게 남긴 변화는 좀 더 클 거라 생각해요. 영선이를 통해, 가족들 사이에서 쉬쉬했던 서로에 대한 생각과 아픔이 수면 위로 떠올랐으니까요. 가족 구성원 각자가 갖고 있는 자신의 못난 모습도 스스로 마주한 계기가 됐고요. 겉으로 볼 때, 그들의 일상이 달라지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분명 내면에서는 큰 움직임이 시작됐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곧 그 변화가 터져 나올 거라고 생각해요."

- 영선은 이전과 달리 누구의 기대도 받지 않는 공간에서 다시 테니스를 시작합니다. 감독님께서는 영선이 되찾은 것과 그 장면으로 관객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싶으셨나요?
"저는 이 장면에서 영선의 모습이 가장 편안해 보였어요. 말 그대로, 승패를 가릴 필요 없는 공간이잖아요. 극 내내 경직되고 긴장되어 있던 영선이 잠시나마 자기 모습 그대로 서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흙바닥 코트에 다시 선 영선이 되찾은 건 ‘오늘’ 그리고 ‘희망’이라고 생각해요. 어제의 좌절을 딛고 일어선 영선의 모습이, 관객들에게도 내일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작은 희망으로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영화 '캐리어를 끄는 소녀'는 내달 2일 개봉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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