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라마의 거장으로 불리는 안판석 감독이 지난 12일 향년 64세로 별세했다. 지난해 폐암 진단을 받고 치료를 이어오던 중 7월 뇌출혈로 쓰러진 것으로 전해진다. 오는 10월 방송 예정인 ENA 드라마 '연애박사'가 유작이 되었다.
안판석 감독을 대표하는 작품이라면 배우 김명민을 스타로 만들었던 MBC 드라마 '하얀거탑'을 꼽을 것이다. 원작 소설과 일본 드라마의 강력한 뼈대가 있었지만, 컷을 줄이면서 캐릭터들의 욕망을 세심하게 잡아내는 연출력이 정말 탁월했다. 각 배우들의 눈빛부터 표정 연기까지 화면 안에 오랫동안 잡아낸 연출 덕분에 몰입감도 좋았다. 김명민 연기는 설명할 필요 없이 정말 대단했지만, 그만의 눈빛과 표정 연기를 섬세하게 포착한 덕분에 더 좋은 배우로 성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안판석식의 연출의 핵심은 캐릭터들의 감정을 함부로 잘라내지 않는 것이다. 대사가 끝난 뒤의 침묵, 상대가 눈을 피하는 찰나, 평온한 대사 속에서도 변화하는 목소리와 표정 등 감정이 바뀌는 데 필요한 시간을 절대 놓치지 않는다. 지금도 하얀거탑의 클로즈업 장면들을 보면, 캐릭터가 스스로 감추고 싶은 감정까지 들추는 효과를 보여주고 있다. 지금도 장준혁(김명민)과 이주완(이정길)의 클로즈업 된 얼굴이 생생히 기억이 난다.
로맨스 역시 안판석 감독의 진가를 보여주는 장르다. 한때 제목이 유행했던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와 '봄밤'은 안판석 감독의 시너지를 받았던 작품들이다. 핑크빛 로맨스도 훌륭하지만, '사랑' 앞에서 모든 것을 감당해야 하는 캐릭터들의 압박감까지 촘촘하게 묘사한다. 캐릭터의 감정을 놓치지 않는 연출력이 로맨스에서도 빛이 나는 것이다.
'졸업'은 학원가 안에서 벌어지는 욕망을 보여줬던 흥미로운 드라마였다. 로맨스보다 대립 장면이 더 기억에 남는데, 누가 특별히 악당이라기보다 각자의 논리가 너무 현실적이었기 때문이다. 학원가 선생들이다 보니 일반적인 갈등과는 달라서 더 독특하고 재밌던 기억이 난다. 안판석 감독의 연출력이 더해지면서 공기의 밀도마저 긴장감을 만들어내는 것 같았다.
최근 작품 '협상의 기술'이 다시 한번 정점에 오른 드라마였다. '하얀거탑'에서 보여줬던 장기를 그대로 가져온 것 같아서 더 좋았다. M&A, 주가 조작, 기업사냥 같은 무게감 있는 소재를 꽤 전문적이면서 차갑게 전개한 덕분에 안판석 감독 스타일과 더 맞았던 것 같다. 한국 드라마가 다루지 않은 드문 소재다 보니, M&A 전문가와 불편한 대면 장면을 오래 보고 싶은 팬들이 꽤 많았을 것이다. 그런 사실주의적인 암투 문제의 결이 안판석 감독 연출과 잘 맞아떨어졌다.
안판석 감독의 작품들에는 영화적인 분위기가 있다. 캐릭터가 대사를 치기 전에 나오는 표정과 정적을 한 장면 안에서 설계하는 연출이 꽤 섬세하다. 여타 드라마와 체감이 확연히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안판석 사단'이라는 말이 나오는 건 아마 그의 철학 덕분일 것이다. 길해연, 오만석, 장현성, 김학선, 허정도 등 같은 배우들이 반복해서 등장하는 건 단순히 익숙하거나 인맥 차원은 아닐 것이다. 물론 배우의 리듬과 연기의 결이 감독의 스타일과 맞는 경우는 많지만, 안판석 감독만의 스타일에 부합하는 배우들은 그리 많지 않을 수도 있다.
안판석 감독의 힘은 작품 속 인물이 가진 감정을 완벽히 보여주는 것이다. '하얀거탑'의 권력욕이나 '밀회'의 위험한 사랑, '졸업'의 학원가 암투, '협상의 기술'의 M&A와 주가 조작 등 모두 안판석 감독이 배우를 바라보는 시선에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컷을 많이 나누지 않고, 배우의 얼굴을 오래 남겨서, 캐릭터의 감정과 배우의 연기력을 동시에 전달하는 연출. 그렇게 만들어진 캐릭터들이 작품을 더 살아 있게 만들었다.
오는 10월 방송되는 안판석 감독의 유작 '연애박사'는 유진(김소현)이라는 여인과 고등학교 때 수영선수였지만 한 쪽 다리를 잃은 민재(추영우)와의 로맨스를 그렸다. 로봇 연구실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여타 로맨스물과 차별화가 보인다. 이번에도 안판석 감독만의 연출력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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