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년 동안 돈 쓰지 않고 영국에서 살아남겠다니, 저러다 큰일 나면 어쩌려고."
'담요를 입은 사람'의 시놉시스를 보면서 아찔했다. 국내도 아닌 타국에서 0원으로 살아보겠다는 생각을 어찌할 수 있겠는가. 어찌 되었든 박정미 감독의 이런 아찔한 계획에 흥미가 생기는 건 어쩔 수가 없다. 감독은 영국을 시작으로 터키와 이란, 인도까지 거치면서 뜻밖에 깨달음을 얻게 된다. 이건 '담요를 입은 사람'이라는 다큐멘터리가 탄생될 수밖에 없었던 하나의 운명이었다. 선행을 베푸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감독 스스로 연대의 의미를 깨달았다는 건 정말 놀라운 일이다. 물론 많은 위기도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길거리에서 만난 평범한 시민들이 용기를 복돋아주었다.
박정미 감독은 남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삶의 전제를 의심하고 실험하면서 자기 방식의 삶을 만들었다. 분노로 출발한 여정이 자아를 찾는 과정이 되면서 평온, 사랑, 연대로까지 도달했고, 혼자가 아닌 '우리가 함께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묻게 한다.
아래는 박정미 감독과의 일문일답.
- '1년 동안 돈 쓰지 않고 영국에서 살아남기' 프로젝트를 하면서 수많은 경험을 했을 것 같습니다. 다큐멘터리에 담지 못했던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0원 살이 과정에서 다큐멘터리에 담지 못한 이야기가 상당히 많습니다. 하루 종일 촬영하고도 통재로 들어내야 했던 장소도 있었고, 함께했던 다른 공동체의 이야기도 상당수 영화에서 빠졌어요. 사실 마지막 여행지는 이란이 아니라 인도였는데, 영화에서는 긴장이 최고조에 달한 이란을 마지막에 넣었습니다.
인도는 물가가 저렴해서 비교적 적은 돈으로 생활할 수 있었어요. 위험한 지역을 제외하고는 히치하이킹을 하고, 노동력을 제공하는 대신에 숙식을 해결했습니다. 불교를 탐구하기 위해 3개월 정도 머물렀습니다. 산속에서 생활했던 경험이 인도로 이어지면서 앞선 여정에서 경험한 삶의 방식과 내면의 변화가 자연스럽게 연결됐다고 생각합니다."
- 런던에서 힘든 일을 겪으셨다고 하지만, 1년 동안 타국에서 돈 쓰지 않고 살아남는 프로젝트는 위험해 보였습니다. 그런 선택이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뒤늦게 후회하지 않으셨나요?
"처음부터 돈 없이 살아가는 삶을 상상했던 것은 아니었어요. 런던에서 직장 생활을 하면서 여러 갈등이 있었고, 괴롭힘을 이겨내야 했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 돈을 포기하고 살아가는 두려움보다 더 컸어요. 돈이 없으면 죽는 삶, 그런 시스템 속에서 노동을 하는 것이 끔찍하게 다가왔습니다. 이것은 곧 분노였고, 시련처럼 다가왔습니다. 그렇게 우울과 침체 속에서 절망하다가 0원 살이 영감이 떠오르면서 어두운 터널 안에서 빛을 본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것이 저에게 유일한 살길이라고 느껴졌습니다.
후회 같은 것은 절대 없었습니다. 한순간에 저의 삶이 다른 가능성을 보여줬거든요. 직장 생활은 노동의 노예가 되어 하기 싫은 일들을 해야 했고, 함께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과 있는 것이 끔찍해서 우울감이 들었습니다. 기적과 같은 일이었지요. 자급자족하고 대안 주거를 내세우는 활동가들을 만나면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직장을 잃어버리면 돈에 대한 두려움이 먼저 생기기 마련입니다. 돈 없이 살면 하루하루 생계에 대한 두려움이 생기는데, 사실 돈이란 건 그런 두려움을 덮기 위한 수단이자 환상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지금도 두려움이 있지만, 여정을 시작하기 전에 가졌던 두려움은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 영화를 보면서 '자아'를 찾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구나 지금의 자신이 행복하지 않을 때, 불안해지고 조급해집니다. 감독님께서 생각하시는 '자아'를 찾는 일은 무엇인가요?
"저에게 이 여정은 '나를 찾아가는 과정'이자 '삶의 방식을 찾아가는 과정'이었습니다. 그 여정으로 다시는 돈과 소비, 노동 시스템에 얽매이지 않길 바랐습니다. 제가 여정을 그만두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아직까지 어디로 가는지, 어디서 왔는지, 삶과 존재의 의미에 대한 답을 아직 못 찾았기 때문입니다. 여정을 시작하기 전에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있었고, 답을 찾기 위해 무모한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다음 목적지로 계속 안내했고, 터키와 이란을 거쳐 인도까지 갔습니다. 인도는 많은 종교와 철학이 있는 나라잖아요.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에 있으며, 이건 지금도 계속되는 여정입니다. 머리로는 좀 알겠는데, 단순히 지식이나 정보로는 완전히 알 수는 없을 것 같아요. 많은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목표는 없지만, 목적의식은 있다"라는 말씀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그 답에 대해서는 마지막 시로 비유하신 것 같은데요. 그 시를 통해 어떤 의미를 전달하고 싶으셨나요?
"따로 존재하는 시는 아니고, 제가 따로 적은 글이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목표가 있잖아요. 주거나 직장, 야망을 성공의 기준으로 보고 향하는데, 저는 과정 자체가 삶의 목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궁극적으로는 나를 찾아가는 과정이죠. 참된 나에 이르게 하는 게 목표치인데, 천천히 갈 수도 있고 좀 돌아갈 수도 있죠. 매 순간 내가 있는 장소와 한 걸음 한 걸음이 삶의 목적이 되고, 이 순간 최선을 다하면 만족하는 삶이 될 것입니다.
지리산 둘레길을 걸어가는 마지막 장면은 삶의 목적지가 아니라 여정 자체입니다. 여정을 마무리하고 집에 온 것처럼 보이지만, 계속 갈 것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어요. 탐욕이나 욕심이 아니라 진실함과 순수함으로 함께 살아가고 싶은 마음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담요는 가난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포근하게 덮어주면서 집처럼 위안을 느낍니다. 영화 제목이 '담요를 입은 사람'인데, 많은 사람들이 서로 경계하고 갈등하지만, 따뜻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담요가 되어 보자는 것이죠.
저는 처음에 거창하게 여정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는데, 길거리에서 만난 평범한 사람들은 먹을 것을 주고 보살펴주는 천사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는 줄 것도 없는 사람인데 받기만 하니 감사한 마음이 계속 커졌습니다. 그러면서 저도 주고 싶은 사람이 되어 갔어요. 누구를 돌보고 보살피는 사람이 되어 가고 있었죠. 그런 면에서 마지막 장면은 목적지에 도달했다는 것이 아니라 담요가 온 세상을 품고 살아가는 그런 삶을 향해 간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 만약에 런던 직장 생활이 좀 더 좋았더라면, 지금과 다른 삶을 살고 계셨을까요?
"괴롭히는 상사는 있었지만, 동료들과는 친했습니다. 한국 친구들도 있어서 외롭지는 않았고요. 다만 여정 속에서 만난 사람들은 단순히 동료가 아니라 삶의 가능성을 보여줬어요. 직장 생활을 할 때는 동료들이 있어도 두려움 속에서 살았지만, 여정을 시작한 이후에는 근본적인 생계의 두려움을 없애준 용감한 사람들을 만난 것입니다. 그 사람들을 보면서 삶을 다른 방법으로 살아가는 동지들의 느낌이 들었어요. 단순히 친구가 아니라 희망을 주고받는, 생존의 배를 함께 탄 동지와 같은 느낌이 들었지요."
- 히피들과 사원에서 명상을 할 때 자연 속에서 고요의 기쁨을 누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프로젝트를 하면서 불안했던 감독님에게는 꽤 중요한 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영화에는 숲과 자연의 소리, 라인 드로잉만 보였는데요. 당시 감독님의 심경을 좀 더 알고 싶습니다.
"영화로 표현하기 힘든 순간이 있는데, 그 명상 장면은 내면에 일어나는 느낌들이 있었고 깨달은 것들이 있어서 영상으로 담아낼 수는 없었습니다. 책으로는 많이 썼는데, 영화라는 한계가 있어서 자연과 손그림, 내레이션으로 최소화할 수밖에 없었죠. 저는 명상도 제대로 한 적도 없고, 자연과 마음이 분리됐다고 생각해서 고요한 상태에서 감각적으로 일깨우는 것들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고요하거나 적막, 이런 것들은 절 불안하게 하는데, 그때는 내적으로 희열이 있었어요. 묵언도 하고 단식도 했는데, 명상하던 어느 순간에 고요함 속에서 기쁜 마음을 느꼈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깊은 평온함을 느꼈고, 혼자 조용히 있다는 게 얼마나 기쁜 일인지 깨달았습니다.
넵튠이 평온에 이른다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는 이해가 안 갔어요. 돌이켜보면 한동안 평온에 이른다는 게 아니라, 아주 작은 찰나라도 평온함을 체험했던 것 같아요. 그 체험을 바탕으로 앞으로의 여정에도 평온함을 찾아야겠다고 다짐했고, 계획 없이 떠났죠. 명상이라는 게 사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처음으로 고요해진 순간이었습니다. 욕망과 불안에 있으면서 시스템에 익숙해져 있다가 명상이라는 즐거움을 알게 되었죠. 이미 1년에 가까운 여정 동안에 두려움을 극복하고 싶은 욕망이 있었고, 편안해지고 싶은 마음이 올라오는 시점이었습니다."


- 넵튠이라는 남자의 위로가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 돌이켜봤을 때, 넵툰이 한 말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하고 계신가요?
"넵튠과 대화는 2~3시간 정도였습니다. 모든 것은 준비가 되어 있고,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 불안할 필요 없다는 등의 말씀을 하셨는데 당시에는 이해를 못 했습니다. 히치하이킹을 하면서 불확실한 일이 일어나잖아요. 그럴 때마다 넵튠의 말을 녹음한 파일을 꺼내서 들었어요. 듣다 보니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힘이 됐습니다. 여정을 하면서 기적과 같은 일로 채워지고 삶이 두려워지지 않으면서, 한 번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넵튠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두려움이 올라올 때마다 넵튠의 지혜가 담긴 음성 파일을 꺼내 들었습니다.
넵튠을 만났을 때 영화적인 의도는 없었습니다. 근데 현자 같은 모습에 제 속마음을 털어놓고 싶었고, 이 사람 이야기는 꼭 기록하고 싶어졌어요. 그래서 영화에서는 넵튠의 얼굴보다는 촛불과 우주 이미지로 대체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위로를 받은 관객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지금도 불안해하는 청춘들을 위해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청춘뿐만 아니라 청년부터 노년까지 나이와 상관없이 불안하죠. 직장이 있든 없든, 돈이 있든 없든 누구나 불안합니다. 저 사람은 돈이 많고 가족도 있어서 불안하지 않을 것이라는 건 추론에 가깝습니다. 모든 인간은 근본적인 결핍이 있어서 돈과 직장 상관없이 야망만으로는 해소되지 않습니다. '나만 불안한 건 아니다' 이런 말이 왜 위안이 되냐면, 인정하고 나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할 수 있거든요. 두려움을 이겨낼 방법이 돈이라고 믿으면 각자도생처럼 각자만의 길로 갈 수 있잖아요. 야망을 이루려고 하고, 그 마음이 커지면 세상도 불안해집니다. 돈이나 타이틀 등의 울타리를 제거하고 마주해야 합니다. 사랑, 인정, 자아 등 근본적인 두려움에 대해 돈 없이 마주하면 그 끝에는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죽음을 거스를 수 없는 한 죽어가거나 늙어가는 과정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돈 없이 마주하면 어쩌면 나만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이 두려움을 안고 살아갈 수 있을지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연민을 느끼며 서로 돌봐줘야, 그러한 두려움이 있어도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습니다. 어쩌면 두려움이나 불안이 있어서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죠."


- 씨네진처럼 감독님의 찐팬이 된 분들을 위한 후속 작품 준비하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감독님의 인생 영화가 있으신가요?
"저는 사실 감독의 정체성이 없습니다. 어쩌다 저의 경험을 나누고 싶었던 것이지, 영화에 대한 열정은 없어요. 그래서 영화를 다시는 만들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10년 만에 카메라를 켰습니다. 화두는 죽음입니다. 돈 없이 존엄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탐구하듯이, 죽는 과정에서 늙어가고 병들고 돈과 가족이 없어도 존엄하게 죽는 방법을 탐구 중입니다. 아버지가 파킨슨병과 암이 있으신데, 촬영하면서 어떻게 아버지와 보낼지 고민 중입니다. 여기에는 아버지뿐만 아니라 저의 이야기도 들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어떻게 흘러갈지 몰라서, 몇십 년이 걸릴 수도 있지요. 히피들과 본 인상적인 인생 영화들이 있습니다. 고전 영화 '브라더 선 시스터 문'과 '뷰티풀 그린'입니다."
박정미 감독의 기적 같은 다큐멘터리 영화 '담요를 입은 사람'은 오는 9일 개봉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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