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플레이] 혐오의 시대에 필요한 이 작품…왜 다시 '나의 아저씨'를 꺼내 보는가

드라마 '나의 아저씨'와 영화 '타인의 삶'이 우리에게 남긴 묵직한 질문

사진=tvN '나의 아저씨' 홈페이지
사진=tvN '나의 아저씨' 홈페이지

타인의 일상을 몰래 엿듣는 행위는 명백한 범죄이자 폭력이다. 역설적이게도 도청은 한 인간의 가장 가식 없고 적나라한 '진실'에 가닿는 매개체가 되기도 한다. 누군가를 파멸시키기 위해 도청기를 설치했다가 오히려 그 대상의 삶에 감화되어 자신의 인생마저 구원받은 두 인물이 있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의 이지안(이지은)과 영화 '타인의 삶'의 비밀경찰 비즐러(울리히 뮤흐)다.

'나의 아저씨'에서 이지안은 사채 빚을 갚고 회사의 권력 투쟁에서 돈을 얻어내기 위해 박동훈(故 이선균)의 핸드폰에 도청 앱을 깐다. 동독의 비밀경찰 비즐러 역시 체제 유지라는 서슬 퍼런 목적을 띠고 최고 극작가 드라이만과 그의 연인을 감시한다.

두 사람 모두 처음에는 철저히 냉혹한 관찰자였다. 대상의 약점을 잡아 숨통을 끊어놓으려는 사냥꾼에 불과했다. 이후 이어폰 너머로 들려오는 타인의 삶은 그들의 예상과 완벽히 빗나갔다.

지안은 속물적이고 부패한 꼰대일 것이라 여겼던 동훈이 사실은 누구보다 삶의 무게를 묵묵히 견뎌내는 선한 어른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비즐러 역시 체제 전복을 꾀하는 불온 분자를 기대했지만, 그가 마주한 것은 예술을 향한 드라이만의 순수한 열정과 자유, 그리고 애달픈 사랑이었다.

자신이 굳게 믿던 신념과 반대되는 증거를 마주할 때 겪는 혼란을 '인지부조화'라 부른다. 지안의 '인간 혐오'와 비즐러의 '이데올로기'는 도청기 너머의 진실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져 내린다.

사진=라이브러리컴퍼니/트리플픽쳐스 제공
사진=라이브러리컴퍼니/트리플픽쳐스 제공

이들의 감정적 동화를 철학적으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프랑스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우리가 고통받고 연약한 '타자의 얼굴'을 마주할 때, 이기적인 자아에서 벗어나 무한한 윤리적 책임감을 느끼게 된다고 역설했다.

지안에게 동훈의 무거운 발소리와 고단한 한숨 소리는 곧 '타자의 얼굴'이었다. 아무도 없는 텅 빈 공간에서 홀로 삼켜내는 동훈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지안은 처음으로 자신과 타인의 고통이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일방적인 관찰자가 대상에게 깊은 내적 친밀감을 느끼는 '파라소셜 관계(Parasocial Interaction)'의 가장 극단적이고도 숭고한 형태다.

관찰자가 피관찰자의 삶에 깊숙이 연루되면서 겪는 심리적 파동과 윤리적 딜레마는 오랜 시간 거장들이 탐구해 온 매력적인 테마다.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1974년작 '컨버세이션(The Conversation)'은 도청을 업으로 삼는 자의 딜레마를 밀도 있게 다룬 고전이다.

도청 전문가인 주인공 해리 콜(진 핵크만)은 철저히 직업적 거리를 유지하려 애쓴다. 광장에서 녹음된 젊은 남녀의 대화를 수없이 되감기 하며 분석하는 과정에서 두 사람이 살해당할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진실에 도달한다. 두 사람의 운명에 개입하고 싶어 하는 강렬한 충동과 감시자로서의 본분 사이에서 파멸해 가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관찰의 무거움을 서늘하게 증명한다.

알프레드 히치콕의 1954년작 '이창(Rear Window)' 역시 연장선에 놓여 있다. 다리를 다쳐 아파트 창문으로 이웃의 삶을 훔쳐보는 주인공의 엿보기는 본질적으로 도청과 궤를 같이한다. 관찰자는 자신이 안전한 거리 밖에서 극장을 구경하고 있다고 믿지만, 타인의 서사에 매혹되고 개입하는 순간 결국 그 위험한 사건에 개입하게 된다.

과거의 지독한 상처와 폭력의 굴레 속에서 자신의 삶마저 망가뜨렸던 지안은 결국 자신을 벼랑 끝으로 내몰았던 사채업자와의 지독한 악연과 망가진 삶을 되돌아보게 된다. 동훈을 회사에서 몰아내려는 거대한 음모에 맞서 그를 지키는 견고한 방패가 되기를 자처한다. 비즐러 또한 상부에 드라이만을 고발하는 대신, 그의 비밀을 덮어주고 스스로 몰락의 길을 걷는다.

우리는 소셜 미디어를 통해 끊임없이 타인의 일상을 들여다보고 전시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타인의 진짜 슬픔과 고단함에는 철저히 귀를 닫는 모순과 지독한 외로움 속에 갇혀 있다.

진정으로 타인의 고통을 듣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폭력적이고 차가운 감시의 도구마저도, 그 끝에 닿아 있는 것이 진실되고 선한 인간의 마음이라면 가장 따뜻한 구원의 동아줄이 될 수 있다. 타인의 숨겨진 한숨에 온전히 귀 기울이는 법, 그 맹렬한 연민을 통해 내 안의 지옥을 빠져나오는 기적. 이것이 우리가 팍팍한 현실 속에서 '나의 아저씨'라는 작품을 끊임없이 되감기 하며 마음에 새기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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