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이 없을 때 장난감들이 살아 움직인다'
어린 시절 누구나 한 번쯤 이런 상상을 해봤을 것이다. 내가 방을 나가면 장난감들이 서로 대화하면서 장난을 치지 않을까. 내가 잠들면 장난감들이 몰래 움직여서 어디를 다녀오는 건 아닐까. 아침이 되면 모든 인간들을 감쪽같이 속이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건 아닐까. '토이스토리' 시리즈는 그런 상상력을 영화 전체의 세계관으로 만든 작품이다. 메시지가 아무리 철학적이고 묵직해도 기본적인 재미는 늘 살아 있는 장난감들이었다. 웃음이 절로 나오는 상상력이 토이스토리 시리즈에 모두 담겨 있었다. 장난감들이 몰래 작전을 짜고, 사람들의 인기척이 들리면 즉시 쓰러져서 안 움직이는 척하는 이런 일종의 놀이와 같은 장면들은 성인이 돼도 절로 흐뭇해진다.
그렇다고 토이스토리 시리즈를 단순한 어린이영화로 보면 안 된다. 이 시리즈는 시대에 따라 묵직한 메시지를 던졌다. 1편이 나왔던 1995년으로 돌아가 보자. 냉전시대를 거쳐 오로지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가치관으로 월가의 민낯까지 지켜봤던 미국은 90년대에 들어서면서 영화의 주제의식들도 달라졌다. 록키4에서 실베스터 스탤론이 돌프 룬드그렌을 이기고 소련과 이제 잘 지내자는 메시지를 던진 장면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토이스토리의 버즈도 처음에는 자신이 레이저를 쏘고 하늘을 날 수 있는 우주 전사로 알았다. TV 광고에서 자신과 똑같이 생긴 버즈 장난감들을 보기 전까지 말이다.
만약에 토이스토리 1편이 80년대에 나왔다면, 버즈가 저그 황제에 맞서는 영웅으로 묘사됐을 것이다. 저그 황제가 "실은 내가 네 아버지야."라며 스타워즈 패러디를 하는 명장면도 보지 못했을 것이고, 버즈의 "날아가는 게 아니라 멋지게 추락하는 거야"와 같은 명대사도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인정 욕구에 연연하지 않는 시대를 통찰하는 명대사였다. 레이저도 쏘지 못하고 날지도 못하지만, 짧은 순간을 소중히 여기며 몰입하는 진짜 '자아실현자'가 된 것이다.

2편에서 우디는 제시, 불스아이, 스팅키 피트와 함께 한 세트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여기서 제시의 과거가 중요한 계기가 된다. 제시는 한때 주인에게 사랑받았지만, 주인이 성장하고 성인이 되자 결국 버려졌다. 어린이영화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깊은 감정을 보여준 셈이다. 이때부터 장난감들에게 소외되는 감정을 넣으며 깊이 있는 시리즈로 발전했다. 제시는 버려진 기억 때문에 인간에게 돌아가기를 두려워하지만, 우디는 결국 주인인 앤디에게 돌아가는 선택을 한다. 언젠가 끝나더라도, 사랑받는 시간이 짧더라도 주인의 품에 돌아간 것이다. 인간관계도 비슷하다. 우정과 사랑, 가족애도 시간이 영원하지 않다. 그렇다고 우리들은 그런 시간을 포기하지 않는다.

3편은 2편의 정서를 그대로 이어받았다. 앤디는 이제 대학에 가기 때문에 장난감들이 더는 필요하지 않다. 장난감들의 두려움이 현실이 된 것이다. 3편이 가장 강렬한 기억으로 남는 이유는 성인이 된 앤디와 장난감이 이별하는 순간을 다뤘기 때문이다. 이 당시에 전작을 봤던 아이들이 모두 성인이 됐다는 점도 절묘하다. 그들 모두 앤디를 보면서 잠시 잊고 있었던 장난감들을 떠올리지 않았을까.
3편의 빌런으로 나오는 랏소 베어 역시 단순한 장난감이었지만, 주인에게 버려지면서 독한 마음을 품었다. 제시는 버려진 기억 때문에 두려워하지만, 랏소 베어는 증오심이 생긴 것이다. 그 덕분에 토이스토리의 빌런들은 미워할 수가 없다. 그들 역시 사랑받고 싶었던 장난감들이었으니까.
3편의 결말이 여전히 기억에 남는 이유는 이별을 새로운 시작으로 해석한 덕분이다. 앤디는 떠나고, 그의 어린 시절도 이제 볼 수 없지만, 보니라는 내성적인 아이에게 장난감들을 물려준다. 그러면서 앤디의 추억까지 전달하면서 눈물샘을 자극한다. 마지막에 우디를 건네줄 때 망설이는 모습은 어린 시절의 추억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한다.

3편의 완벽한 결말 때문이었을까. 4편이 나왔을 당시에 기쁨보다 불안이 앞섰다. 우리 우디와 버즈 친구들이 또 버려질까 두려워해야 하는 건가. 4편에서는 우디의 정체성에 대해 물으며 좀 더 현대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우디는 보니가 갑자기 만들어낸 포키를 어떻게든 붙잡으려고 애쓴다. 포키는 자신이 버려져야 하는 쓰레기라고 믿었고, 우디는 보니에게 소중한 존재라면서 어떻게든 쓰레기통으로부터 떼어 내려고 한다.
여기에서 보 핍이라는 장난감이 우디의 가치관을 흔들어 놓는다. 보 핍은 어느 주인에게 소속되지 않고 주체적으로 움직인다. 그동안 아이들 곁에 있지 않으면 실패한 인생이라고 믿었던 우디는 끝내 마음을 고쳐먹는다. 보니에게 돌아가지 않고, 보 핍과 남기로 한 우디의 선택은 지난 시리즈들을 생각해 보면 파격적이다. 우디는 잃어버린 장난감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찾았다는 버즈의 마지막 대사가 여전히 귓가에 맴돈다.

이제 5편에서는 지금의 시대 문제를 얘기하고 있다. 우디와 버즈 장난감들의 경쟁자로 스마트 기기 릴리패드가 나타난 것이다. 오늘날 아이들에게 스마트 기기는 빼놓을 수 없는 놀잇감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진화로 볼 수 있다. 이제 장난감들은 태블릿, 스마트폰, SNS, 숏폼 영상들과 경쟁할 처지에 놓였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스마트 기기는 즉각적으로 보상을 제공한다는 것. 장난감은 아이들이 상상력을 불어넣어야 비로소 살아난다는 점이다.
보니는 원래 내향적이라서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려면 릴리패드가 꼭 필요하다. 릴리패드 안의 게임은 혼자 해도 반응을 주고, 메신저는 친구들과 연결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릴리패드 역시 보니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은 욕망이 있다는 것이다. 버즈와 경쟁하며 앤디에게 잘 보이려고 했던 우디의 상황과 비슷하다. 우디도 자신이 최고의 장난감이라고 믿었고, 그 자리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버즈와 경쟁했다.
대신에 릴리패드는 보니에게 상처를 주는 상황을 인정하지 않는다. 자기 방식이 틀렸다고 인정하지 않는 부모, 친구, 연인들처럼 말이다. 그들은 자식, 친구, 연인을 위한다고 하지만 그 방식 때문에 상대가 다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릴리패드는 단순한 빌런이 아니라 AI 시대에서 기술을 확신하는 상징처럼 보인다.

이제는 아이들이 그림을 그리기 전에 AI가 이미지를 만들어주는 시대가 됐다. AI가 이야기의 서사를 만들어주고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시대다 보니 상상력의 부재를 우려할 만하다. 아이가 스스로 상상하고, 성공하기 전까지 실패와 시도를 반복할 수 있는 시간이 사라지게 둘 수는 없다. 이번 5편은 보니가 장난감들과 함께 왕성한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처럼, 아이들이 지금 이 시대에도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지 묻고 있다.
토이스토리 시리즈는 전부 시대에 맞는 고민과 맞닿아 있었다. 장난감의 역사가 아니라 인간의 불안과 욕망을 기록한 시리즈이기도 하다. 대신에 변하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고 싶고, 소외되기 싫은 정말 인간적인 감정들 말이다. 우디와 버즈 친구들이 인간이 가진 가장 원초적인 마음을 대신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이 시리즈는 영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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