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월이 흐르면서 새롭게 보이는 작품이 있다. 젊은 시절에는 파괴적인 에너지와 해방감이 보였지만, 그 모든 과정이 한 평범한 현대인의 처절한 몸부림을 상징하고 있다는 것을. 데이비드 핀처가 척 팔라닉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영화 '파이트 클럽(1999)'이다.
주인공 잭(에드워드 노튼)은 보기에 안정된 삶을 살고 있다. 자동차 리콜 심사관이라는 비교적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고 있고, 부족한 것 없이 여느 중산층처럼 소비를 하며 살아간다.
원작 소설에서는 잭이 두서없이 떠들어대는데, 영화에서도 마치 의식의 흐름처럼 끊임없이 넋두리를 늘어놓는다. 그가 환자 행세를 하며 암 환자 모임에 나가는 지경까지 이를 정도로 자존감이 떨어지고 불면증까지 심각하다는 것이 그리 중요하게 보이지 않았다. 누구나 기억하는 마지막 장면에서 '잭이 그저 짜릿한 해방감을 느꼈을 것이다' 정도였다. 이후 세월이 흘러 잭처럼 직장을 다니고 사람에게 치이고 진저리가 날 정도로 사회생활을 겪어보니 이 남자가 그렇게 처량해 보일 수가 없다.
현대인들이라면 한 번쯤은 자신의 감정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할 때가 있을 것이다. 스스로 납득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감정을 확인하려고 든다. 잭에게 암 환자 모임은 일종의 탈출구였고, 동시에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정서적 기생에 가깝다.

그 와중에 잭이 테일러 더든(브래드 피트)이라는 상상 속 인물을 만들어 낸다. 잭이 할 수 없는 것들을 망설임 없이 해내는 사람. 주먹을 주고받으며 무뎌진 감정을 깨어나게 해준 사람. 잭은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처음으로 해방감을 느낀다.
개인 일탈로 보였던 잭의 행동은 점점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잭과 같은 현대인들이 맹목적으로 추종하더니 폭탄 테러까지 감행할 정도로 조직이 커진다. 이들 역시 잭처럼 누구가 삶의 방향을 대신 정해주기를 바랄 정도로 측은한 사람들이다.
여전히 잭이 암 환자 모임에 집착하는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에게는 가식이 없기 때문에 타인의 따뜻한 품에 안겨 펑펑 울 수 있었다. 우리들 역시 잭처럼 사회적 가면을 쓰고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위로받고 싶은 순간이 있다.
젊은 시절에는 폭탄 테러가 시스템의 파괴로 보여서 체증이 내려가는 통쾌함도 있었다. 은행들을 폭파시켜서 모든 빚을 사라지게 하고 제로에서 다시 시작하자는 테일러 더든의 철학에 동조했다.
세월이 흘러 잭의 입에 총구가 들어온 장면이 처음과 마지막을 장식한 이유를 이해하게 된다. 빈곤을 깨달으며 자아를 찾아가는 아주 위험하고도 처절한 영적인 여정이었다. 이제야 잭이 두서없이 떠드는 행위가 지친 영혼이 내뱉는 신음이었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파이트 클럽은 공개 당시에 광고 감독 출신 데이비드 핀처의 초점에 맞춰 비주얼에 대한 평가가 많았다. 이 작품을 다시 꺼내든 이유는 내 안의 영혼이 안녕한지를 묻는 서늘한 질문지였다는 것과 동시에 그만큼 치열하게 삶을 일구어 온 관객들이 뒤늦게 재평가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잭의 시선을 따라가며 그의 분열된 정신 상태를 여과 없이 체험하게 만드는 기법은 지금 봐도 몰입감이 대단하다. 내면의 억압을 이기지 못하고 이중생활을 하며 거대한 파괴자로 변모하는 설정은 시대가 변해도 고전 서사들의 카타르시스와도 맞닿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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