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름 없는 자(Nameless)'가 요구하는 감정은 대체로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 같다. 야마다 타로(사토 지로)는 어린 시절부터 오른손에 닿는 모든 생명이 죽어 버리는 고통을 겪었다. 생명이 없는 물건 따위는 육안으로 보이지 않아서 신기한 능력으로 보이지만, 꽃이나 사람처럼 살아 있는 것들은 모조리 죽게 된다. 이것을 저주로 받아들인 야마다는 어느 순간 세상을 향해 분노를 폭발한다.
한때 '묻지 마 범죄'에 대한 사회문제가 있었는데, 이제 많은 사람들이 가해자들의 왜곡된 논리를 이해하고 있다. 자신만 불행해 보이고, 세상이 나를 무시하는 것 같고, 누군가에게 복수는 하고 싶은 심리들이 깔려 있는 것이다. 물론 모두 정당화할 수 없지만, 최소한 가해자의 심리를 이해할 수는 있다.
야마다의 불행은 좀 달라 보인다. 그를 데려다 키워준 경찰이 있었고, 어린 시절부터 남매처럼 함께한 여동생도 있었다. 저주에 걸린 오른손 때문에 비극으로 남으려면 세상을 원망하는 감정이 살아 있어야 하는데, 야마다 자신이 문제로 보이기 시작한다. 분노의 방향이 납득이 안 되는 것이다.
X맨의 로그는 만지는 사람의 생명력과 능력을 흡수한다. 설정만 보면 야마다와 비슷하게 끔찍하고 비극적이다. 프로페서X(찰스 프랜시스 자비에)를 만나면서 X맨으로 거듭나지만, 관객들은 여전히 로그를 불쌍하게 여긴다. 이러한 감정이 생기는 이유는 로그가 끊임없이 다른 사람과의 연대를 고민하고 있기 때문이다. 장갑을 끼고 거리를 두고 능력을 통제하려고 애쓴다.
반면 야마다는 세상이 나를 받아 주지 않는다면서 '묻지 마 살인'을 저지른다. 진짜 비극은 무엇일까. 야마다처럼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불행이 생긴다고 해서 무조건 비극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 세상에는 끝도 없는 불행을 두고 극복하는 사람들도 많다. 로그의 비극은 능력 자체가 아니라 그 능력을 안고 살아가는 노력에서 나왔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그냥 이 세상은 잔인해'라는 불만에만 머물러 있다.
이렇게 문제를 '잔인한 세상'만 강조하면 이야기의 입체감도 죽게 된다. 오직 파괴와 증오만 보여주면 인간의 가장 어두운 부분만 보여주는 셈이 된다. 오이디푸스 왕처럼 고전 비극들도 주인공이 파멸하지만 관객은 인간의 운명과 한계를 고민하게 된다. 야마다처럼 세상을 저주하고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이고, 신마저 저주하는 식으로 가면 어떤 통찰도 남지 않게 된다. 마지막까지 세상을 증오한다는 결말은 영화의 의도대로 매우 슬프지만 그만큼 피로감도 쌓이고 말았다.
한편 영화 '이름없는 자'는 제30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BIFAN) '시그니처' 섹션에서 상영했다.

댓글 (0)
댓글 작성
댓글을 작성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로그인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