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플레이] 혐오가 오락이 된 시대를 비추는 거울 '아메리칸 사이코'를 다시 보는 이유

자본과 권력이 혐오를 생산하고 대중이 소비하는 시대의 민낯

사진=KMDb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사진=KMDb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영화 '아메리칸 사이코'는 시간이 흐를수록 기묘한 생명력을 얻고 있는 작품이다. 80년대 월스트리트의 탐욕을 풍자한 이 기괴하고 추한 영화는 지금의 시대상을 반추하게 만드는 작품으로서 그 가치가 여전히 유효하다.

패트릭 베이트먼은 최고급 슈트와 시계, 명함의 폰트나 최고급 레스토랑의 예약권, 완벽한 스킨케어 루틴으로 포장하려 애쓰는 인물이다. 외형적 스펙과 자극적인 온라인 페르소나에 집착하는 현대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허황된 물질과 맹목적인 허영으로 채우려는 시도는 시대의 형태만 바뀌었을 뿐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이러한 내면의 공허함이 타인을 향한 조롱과 혐오로 발현되는 것이 문제다. 극심한 경쟁 사회 속에서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하지 못하면 가장 자극적이고 극단적인 집단에 동화되어 비뚤어진 우월감을 탐닉할 가능성이 높다. 타인의 고통이나 역사적 비극조차 오락거리로 삼고, 맹목적인 진영 논리에 갇혀 혐오를 배설하는 작금의 상황과 맞닿아 있다.

베이트먼의 끔찍한 폭력보다 더욱 소름이 돋는 것은 그를 둘러싼 주변인들의 완벽한 무관심과 소통의 단절이다. 동료의 이름조차 헷갈려 하는 것처럼 지금의 우리 역시 타인과 진실되게 연결되지 못한 채 각자의 고립된 세계에 갇혀 있다. 누군가 고통을 호소하고 비극이 벌어져도, 사회는 그저 알고리즘 속 하나의 콘텐츠로 무감각하게 소비하고 지나칠 뿐이다.

베이트먼의 절박한 고백이 묵살당하는 장면은 괴물을 묵인하고 보호하는 거대한 시스템의 민낯을 보여준 셈이다. 집값을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살인 현장을 깨끗이 치워버리는 부동산 중개인의 모습은 권력과 자본을 쥔 그들이 어떤 악행이나 혐오를 조장해도 결국 시스템 안에서 살아남는 현실의 부조리를 떠올리게 한다. 이 견고한 카르텔 속에서 개인의 도덕성이나 진실은 전혀 중요한 가치가 되지 못한다.

이 영화는 성공과 돈이라는 단일한 목표에 매몰된 채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을 잃어버린다면 누구나 괴물이 될 수 있다는 섬뜩한 경고를 던진다. 우리가 현실에서 마주하는 극단적인 갈등과 혐오 세력 역시 이러한 구조적 병폐와 정체성의 상실이 낳은 필연적인 결과물일지도 모른다.

베이트먼은 자신의 고통과 타인에 대한 혐오를 인정하면서도 카타르시스를 느끼지 못한다. "내 벌은 계속해서 나를 피해 가고 나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다. 내 이야기에는 아무것도 새로운 것이 없다"라는 마지막 고백이 지금의 혐오를 조장하는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원작 소설에서도 강조됐던 "THIS IS NOT AN EXIT"처럼 빠져나갈 출구를 잃었다는 선언처럼 보인다. 혐오와 무관심이 오락이 된 사회를 방관한다면 우리 역시 그 출구 없는 지옥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인간성을 상실한 텅 빈 복제품들의 시대가 완전히 도래하기 전에 타인과의 진정한 소통과 스스로 사고하는 능력을 서둘러 회복해야만 한다.

무감각의 늪에 빠진 현대인들에게 이 영화는 거울이자 유효한 충격 요법이다. 화면 속 베이트먼의 텅 빈 눈동자를 마주하는 순간, 우리는 혐오를 연료 삼아 돌아가는 우리 사회가 얼마나 위태로운 모래성 위에 서 있는지 직시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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