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26년'의 기획 의도는 분명하다. 5·18 민주화운동의 상처를 품고 살아온 희생자 2세들이 마침내 학살의 책임자를 응징하려 한다는 설정은 한국 현대사의 응어리를 대중영화 문법으로 끌어온 대담한 시도였다. 이 작품은 1980년 5월 광주의 비극과 그로부터 26년 뒤 '그 사람'을 단죄하려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전면에 내세운 영화였고, 강풀의 웹툰을 원작으로 하면서 화제를 모았다.
대신에 이 영화를 떠올릴 때마다 한 가지 불편함이 남는다. '그 사람'이 마치 영화 '대부'의 마피아 두목처럼 어둠과 침묵, 느린 동선과 무게감으로 연출되는 순간, 비판의 대상이 아니라 어느새 음산한 카리스마를 지닌 존재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중요한 것은 재현의 문제다. 영화는 단지 인물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조명과 음악과 프레이밍을 통해 그 인물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까지 제안하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학살자나 쿠데타 주동자를 지나치게 위엄 있게 찍는 순간에 영화는 의도와 무관하게 그에게 신화할 만한 서사가 있다는 위험을 떠안게 된다.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 재판을 다룬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이른바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그녀가 본 악은 악마적 심연을 가진 초인이 아니라, 생각을 멈추고 체계에 순응하며 자기 행위를 반성하지 않는 인간의 공허한 일상에 가까웠다.
아렌트의 통찰을 한국 현대사에 가져오면 결론은 선명해진다. 나라를 후퇴시킨 권력자는 거대한 악의 화신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실상은 사유하지 않는 인간, 책임을 회피하는 인간, 자기 행위를 상투어로 정당화하는 인간으로 그려질 때 더 정확해진다. 쿠데타의 얼굴은 장엄함보다 공허함에, 비장함보다 졸렬함에 가까울 수밖에 없다.
니체의 개념을 빌려 보면, 쿠데타형 권력자는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강하고 위대한 존재라기보다, 불안과 열등감, 원한을 권력의 형태로 드러낸 인물에 가깝다. 물론 니체가 현대의 특정 독재자를 직접 분석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개념을 통해 보면 권력은 종종 힘의 표현이 아니라 결핍의 보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도스토옙스키의 '악령'은 이념이 어떻게 타락하는지를 보여주는 소설이다. 문제는 사상이 아니라 그것을 붙잡는 인간이었다. 작품 속 인물들은 혁명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허영과 권력욕, 자기 기만에 사로잡혀 있으며, 그 결과 이념은 공동체를 붕괴시키는 충동으로 변질된다.
조슈아 오펜하이머의 '액트 오브 킬링'은 대량학살의 가해자들이 처벌받지 않은 채 여전히 영향력을 가진 현실 속에서 자신들의 살인을 직접 영화처럼 재연하게 만든다. 이 작품이 충격적인 이유는 가해자를 거대한 악마로 숭배하지 않고, 허영과 자기 연출에 사로잡힌 우스꽝스러운 인간으로 노출시키기 때문이다.
정치적 풍자를 택한 '스탈린이 죽었다!(2019)'는 스탈린 사후 권력 암투를 블랙코미디로 비튼다. 이 영화는 독재 권력을 영웅적 비장미가 아니라 비열함과 공포, 계산과 추태의 집합으로 그린다. 바로 이런 전략이야말로 역사적 가해자를 가장 정확하게 약화시키는 방법일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서울의 봄(2023)'이 많은 관객에게 통한 이유가 설명된다. 쿠데타 세력을 능력 있고 무서운 집단으로만 그리지 않고, 끝내 비열하고 우스운 얼굴까지 함께 보여줬기 때문이다. 국가를 무너뜨린 자들의 내면이 실은 얼마나 천박하고 유치한가를 폭로하는 순간을 그렸다는 점이 높이 평가할 만하다.
결국 역사에 죄를 지은 권력자를 작품에서 어떻게 그릴 것인가는 단순한 연출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아렌트의 말대로 악은 종종 평범하고, 셰익스피어가 보여주듯 찬탈자는 스스로의 공포에 무너지며, 공자의 기준으로 보면 그런 자들은 군자가 아니라 소인이다. 그렇다면 한국 영화가 권력자를 재현할 때 지켜야 할 최소한의 윤리는 분명하다. 그를 두려운 존재로 그릴 수는 있어도, 결코 선망의 대상으로 보이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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